2019.05.27. 부활 제6주간 월요일 2019년




오늘 복음은 요한복음 15장에서 16장으로 넘어가는 부분이라서 양쪽의 장이 다 걸쳐 있습니다. 15장 끝부분에서 예수님은 곧 오실 성령께서 당신에 대해 증언하시리라고 하시고, 16장 앞부분에서는 제자들이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겪게 될 박해를 예고하시면서, 미리 이런 말씀을 하시는 이유를 밝히십니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로 보낼 보호자,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그리고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나를 증언할 것이다."(요한 15, 26-27)

"증언"은 실제로 체험한 사람이 할 수 있는 겁니다. 자신이 직접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 보고 만지고 감동한 내용에 대해 전하고 알리는 것이 "증언"이지요. 사람의 눈으로 볼 때 증언을 하는 주체는 분명 사람이지만, 그 사람 입에, 그의 안에 내용을 담아 주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그래서 실제로는 성령께서 증언하시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증언"의 내용은 무엇일까요? 그 내용은 바로 '하느님의 아들이신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은 성령의 증언에 힘입지 않고 인간의 말재주만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지요. 아무리 제자들이 예수님 곁에서 삼 년을 보고 들었어도 제대로 다 깨닫지 못했다는 걸 복음사가가 이미 우리에게 솔직히 전하고 있으니까요. 제자들이 체험한 것들을 성령께서 "기억하게" 해 주시고 "해석해" 주시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겁니다.

제1독서에서는 필리피에서 말씀을 전하는 바오로 사도 일행의 선교활동을 서술합니다. "리디아라는 여자도 듣고 있었는데 바오로가 하는 말에 귀 기울이도록 하느님께서 그의 마음을 열어 주셨다."(사도 16,14)

여기서 우리는, 복음이 전해지려면 "증언자"와 증언 "내용"뿐 아니라, 증언을 "듣는 이"와, 듣는 이의 마음을 열어 귀 기울이게 하시는 분, 즉 선교의 주관자이신 "하느님"의 존재를 깨닫게 됩니다. 이 모든 존재가 선교의 필수요소인 셈입니다.

다시 정리하자면, 증언의 "현장"에 성부, 성자, 성령, 즉 성삼위 하느님께서 현존하십니다. "증언자"인 제자와 성령의 내면에 담겨 있던 "내용"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듣는 이"의 귀를 통해 그의 마음과 영혼을 관통해 들어가 자리잡으십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이루어지도록, 내용이신 예수님께서 듣는 이를 꿰뚫고 들어가실 수 있게 그의 마음을 열어 주시는 분은 성부 하느님이시고요. 그러니 단 한 사람에게라도 복음이 전해지는 일은 성삼위 하느님께서 사력을 다하고 정성을 다해 힘을 모으시는, 온 우주와 맞먹는 거대한 과업일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이 전파되는 이 총체적인 사랑의 과정이 모두에게 순조로이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닌가 봅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회당에서 내쫓을 것이다. 게다가 너희를 죽이는 자마다 하느님께 봉사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들은 아버지도 나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짓을 할 것이다."(요한 16,1-3)

만일 하느님께서 듣는 이의 마음을 열어 주지 않으시면, 증언자에게서 발설된 증언의 내용이 듣는 이에게 침투되지 못할 겁니다. 마치 딱딱한 갑옷처럼 경직된 그의 존재가 예수님을 튕겨 내어 거부하면 그에게 복음은 스며들지 못합니다. 그는 이 순간 자기를 위해 일하시는 성부도 성자도 성령도 알지 못한 채, 무엇과도 섞일 수 없고 무엇도 받아들이지 않는 돌같은 존재로 남을 뿐입니다. 안타깝게도 그는 어떤 씨앗도 품을 수 없고 싹도 틔울 수 없는, 생명력을 잃어버린 돌덩이, 불모지처럼 멈춰버리게 되고 말지요.

예수님께서 미리 제자들에게 닥쳐올 고난의 여정을 말씀하시는 이유는 제자들이 "떨어져 나가지 않게"(요한 16,1) 하시려는 것이고, 또 "그들의 때가 오면 (당신의) 말을 기억하게"(요한 16,4)하시려는 것입니다. 복음은 모두가 다 알아볼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는, 감추어진 보물이기에, 증언자에게 위험 요소들이 반드시 닥쳐올 터이지만, 그래서 복음을 위한 박해와 죽음이 더욱 가치롭고 의미 있지 않겠느냐는 뜻으로 마음 준비를 시키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이천 년이라는 시간과, 지구를 빙 도는 거리를 지나, 역사의 길고 험한 과정을 거쳐 기적처럼 우리에게까지 전해진 복음이, 예수님의 이름이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지요. 또 이를 가능하게 하신 성삼위 하느님의 사랑의 작업이 얼마나 송구하고 감사한지요.

선교는 다른 게 아니라, 우리가 사랑하는 주님이 너무 좋고 자랑스러워 타인도 그분을 누렸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기쁨과 함께 터져 나와 분출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잘것없는 우리 입을 통해 그분의 이름이 전해지는 순간, 선교는 우리 일이 아니라 성삼위 하느님의 일이 되지요. 우리에게뿐만 아니라 우리의 말을 듣는 상대방 안에서도 성삼위 하느님, 성부 성자 성령께서 현존하시며 협력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그러니 두려워 말고, 주님과 나누는 사랑으로 기쁨 가득한 마음을 드러냅시다. "충실한 이들은 영광 속에 기뻐 뛰며 그 자리에서 환호하여라. 그들은 목청껏 하느님을 찬송하리라."(화답송) 아멘.

2019.05.26. 부활 제6주일 2019년




부활 제6주일의 말씀은 온통 '사랑'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요한 14,23)

우리는 하느님을 볼 수 없습니다. 그분은 순수 영(靈)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상의 삶을 사는 동안 감각적 한계를 벗어날 수 없는 우리를 위해 하느님께서 육(肉)을 취해 우리게 오셨지요. 그분이 바로 성자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는 사람이 되어 오신 예수님을 만나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 말씀을 듣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드리는 사랑은, 한없이 부족하긴 하지만 그 원형은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니까요.(1요한 4,8 참조)

우리가 부족하나마 말씀에 머무르며 주님께 드리는 사랑으로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에 빠져들고 잠깁니다. 사랑 가득한 그 상태를 인간의 언어로 어찌 다 표현할 수 있을까요! 부족한 저로서는 기껏해야 "성부 · 성자 · 성령, 삼위 하느님의 사랑의 도가니, 사랑의 용광로, 사랑의 바다"라 표현해 볼 뿐입니다. 제가 아는 한도 내에서 그래도 뭔가 가득차고 충만한 표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거기서 삼위 하느님 사랑 안에 푹 잠기며 그분과 사랑을 나눕니다.

제1독서인 사도행전 대목에서는 앞으로 펼쳐질 교회 역사에서 "하나됨"을 위해 주요 장치가 될 공의회의 첫 시작을 보여줍니다. 사도와 원로들이 모여 성령 안에서 성자의 가르침을 통해 성부의 뜻을 찾는 이 제도는 교회의 일치를 목적으로 하지요. 여기서는 그 회의가 열린 동기와 결과가 소개됩니다.

"여러분의 형제인 사도들과 원로들이 ... 형제들에게 인사합니다."(사도 15,23)

교회 역사가 수천 년을 지나오는 동안 공의회에서 신학적으로 매우 전문적이고 첨예한 문제들이 다루어지다 보니, 단순하고 소박한 다수의 대중은 적극적 문제 제기나 참여에서 소외되기는 하였지만, 원래 그 본질은 다음 말씀에 잘 담겨있습니다. 곧 "형제가 형제에게", 그리고 "짐을 지우지 않기로 결정하였습니다."(사도 15,28)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하느님의 백성'이고 '그리스도의 몸'이면서도 사람들이 이루어가는 실체이기에 한계가 존재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사랑이 하느님의 사랑처럼 완전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바르나바와 바오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은 사람들입니다."(사도 15,26)라며 예루살렘 사도들과 원로들이 보증한 '환상의 콤비' 바르나바와 바오로도 곧 갈라지게 될 것이니까요.(사도 15,36-41) 물론 이 또한 하느님의 큰 그림 안에서 열매를 맺을 과정이기에 미리 실망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 사이의 관계는 아무리 돈독하고 거룩한 지향으로 뭉쳤어도 한계가 있다는 걸 우리는 체험으로 알지요. 불완전한 우리 인간들 사이의 관계가 삼위 하느님의 사랑의 관계를 어느 정도 흉내내고 반영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 지상의 그림자에 불과하기 때문이겠지요.

제2독서인 요한묵시록에서는 천상 예루살렘, 즉 하느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 모두의 본향이며 이상이고 꿈의 결정체인 하느님 나라를 아름답게 보여줍니다.

"그 도성은 하느님의 영광으로 빛나고 있었습니다."(묵시 21,11)

빛, 광채, 수정, 보석, 벽옥... 인간으로서 떠올릴 수 있는 최고로 귀하고 아름답다 할 표상으로 가득합니다. 모르긴 해도 저자는 그 아름다움을 묘사하는데 나름 한계를 느끼면서 이 대목을 옮겼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천상의 완전한 아름다움을 전하고픈 그 노력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듯합니다.

"나는 그곳에서 성전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과 어린양이 도성의 성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도성은 해도 달도 비출 필요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그곳에 빛이 되어 주시고 어린양이 그곳의 등불이 되어 주시기 때문입니다."(묵시 21,22-23)

과연 성전도 해도 달도 필요 없을 겁니다. 성전과 해와 달이 가리키는 분께서 친히 현존하시며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우리와 사랑을 나누시는데 그분과 우리 사이에 더 무슨 상징이, 무슨 장치가, 무슨 제도가 필요하겠습니까!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요한 14,23)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모두 똑같을 수 없지만 우리는 아직 좀 더, 어쩌면 한참 더 지상의 순례길을 걸어가야 하는 존재들입니다. 묵시록이 보여주는 하느님의 천상 아름다움 속으로 당장이라도 달려가 풍덩 빠지고 싶어도, 지금 여기서 채워야 할 묵묵하고 인내로운 걸음걸음이 아직 우리 각자에게 남아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지금 여기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사랑을 하면서 나아가야겠지요.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분 말씀에 머무르고 그분 가르침을 지키는 것, 이것이 지금 여기서 삼위 하느님의 사랑 안으로 들어가, 그 사랑에 참여하는 길입니다. 아무리 애써 봐도 그 수준인 초라하고 가난한 사랑일망정, 하느님 사랑의 한 조각이라 믿으면서요.

2019.05.25. 부활 제5주간 토요일 2019년




요한복음 15장은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로 사랑을 이야기하면서(15,1-12) 매우 감미롭게 시작되다가, '친구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가장 큰 사랑' 대목에서(15,13-17) 뭔가 불길한(?) 복선이 깔립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읽는 대목에 이르면 어조가 완전히 바뀌어 '미움과 박해'가 언급되지요.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하였다는 것을 알아라."(요한 15,18)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으면 너희도 박해할 것이고, 내 말을 지켰으면 너희 말도 지킬 것이다."(요한 15,20)

예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고 따르는 이는 당신이 겪으신 것을 그대로 겪게 되리라 하십니다. 사랑받고 신뢰받고 존경을 받기도 하지만 미움과 박해와 죽음까지 각오하라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을 사랑하고 따르는 이들은 이미 한 배에 탄 것입니다. 같은 운명, 즉 "운명 공동체'가 된 것이지요. 그들 앞에는 사랑받든지 미움받든지, 살든지 죽든지 둘 중 하나의 길이 펼쳐질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은 "내 이름 때문에"(요한 15,21) 모든 것을 겪을 것입니다. 그 이름은 우리에게 무한한 기쁨과 행복의 원천이 되기도 하고 조롱과 수치와 죽음의 올가미가 되기도 할 것입니다. 제자들을 박해하는 부류와 예수님 말씀을 지키는 부류는 예수님을 보내신 분, 즉 아버지를 모르고 아는 차이입니다.

내 사랑 안에 머물라던 예수님 말씀이 꽤나 심각해졌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럴 땐 딱히 어떻게 대처하라는 해결책은 제시하지 않으십니다. 그저 "그런 줄 알아라" 아니면 "기억하여라" 정도입니다. 정말로, 미움이나 박해, 죽음같은 그런 도전들이 닥치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제1독서인 사도행전에 그 답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고장에 사는 유다인들을 생각하여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베풀었다."(사도 16,3)

티모테오는 유다인 어머니와 그리스인 아버지를 두었기에 실상은 유다 율법에 따라 할례를 이미 받았어야 했지만,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 그리스도인이 된 것입니다. 이방인이 그리스도인이 될 때 굳이 할례를 받지 않아도 된다는 '예루살렘 공의회'의 결정이 있었지만, 유다인과 이방인의 혼혈 자녀일 때의 적용에 있어서 바오로 사도는 '할례'를 택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 입장에서 의무가 아니더라도 자칫 그 고장 유다인들과 마찰을 일으킬 소지를 미연에 방지하여 선교의 걸림돌을 미리 치우려 한 것 같습니다.

"성령께서 ... 막으셨으므로 그들은 ...을 가로질러 갔다. ...로 가려고 하였지만 예수님의 영께서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리하여 ... 로 내려갔다."(사도 16,6-7)

바오로 사도 일행의 동선을 관상합니다. 그들의 길이 번번이 막히고 있네요. 그런데 그들은 개의치 않고 하느님의 뜻을 찾아 다음의 목적지로 발길을 돌립니다. 그게 또 막히면 또 다른 길을 뚫고 있네요. 분명 뭔가 순조로운 진행은 아닌데 그들은 꺾이거나 좌절하거나 주저앉지 않습니다. 제겐 그들의 움직임이 길을 몰라 갈팡질팡 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정말로 치열하게 하느님의 뜻을 찾고 있다고 보입니다.

이 모습이야말로 세상 한가운데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 예수님의 이름을 옷입은 이들이 새겨야 할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신앙을 지키기 위해 반드시 고수해야 할 본질이 아니라면 상대방의 믿음의 정도에 따라 대처하는 유연성, 그리고 가고자 하는 길이 막혀도 좌절하지 않고 다시 일어서서 최선을 다해 하느님의 뜻을 찾는 겸손과 충실성입니다.

하느님 뜻 앞에 유연하고 겸손하며 충실한 영혼은 자기를 미워하고 박해하는 "세상"에 대해 항거하거나 스스로 무너지지 않습니다. 이미 그 길을 가신 스승을 기억하고 묵묵히 그분 뒤를 따르되, "세상"이 아버지를 알기를 기도합니다. 그들이 몰라서 그러는 거라고 예수님도 말씀하셨으니까요.(요한 15,21 참조) 그러니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을 보내신 아버지를 알게 되면, 또 누가 압니까? 바오로 사도도 서러워 할 열혈 사도가 또 탄생하게 될지요.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그러니 두려워하지 맙시다. 미움도 박해도 다 지나갑니다. 왜 미워하냐고, 왜 못살게 구냐고 맞서기보다, 그들도 우리와 하나가 되어 아버지를 알게 해주십사 기도합시다.

"아버지, 이들이 우리 안에 하나가 되게 하시고, 아버지가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소서."(영성체송) 아멘.


2019.05.24. 부활 제5주간 금요일 2019년




"나는 너희를 친구라 불렀다."(요한 15,14)

예수님께서 제자들을(우리를) 친구라 부르십니다! 종은 수직적 · 종속적 상하 관계에서 오지만 친구는 수평적이고 대등한 관계입니다. 그러니 한낱 피조물에 불과한 우리가 주님의 친구로 불린다는 건 참으로 황송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요한 15,15)

언젠가 아주 어려운 일을 결정해야 하는 순간을 마주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며칠 전에 다가올 일을 대충 짐작하게 해주는 꿈을 꾼 것이 떠올라 힘들지만 응답을 했었지요. 하느님께서 당신의 계획을 미리 암시해 주신 것 같이 느껴져서 였읍니다. 저 같이 부족한 사람을 자상하고 섬세하게 존중해 주신 것에 대해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표현이었지요.

그분은 저만치 윗자리에 올라선 채 눈을 내리깔고 "너 따위는 몰라도 돼!" 하는 권위주의적이고 심술궂은 주인이 아니십니다. 우리가 약한 만큼 더 세심하게 살피시며 눈높이에 맞게 말을 걸어오는 분이시지요. 그분의 이런 자상하고 겸손한 배려와 사랑을 깨닫게 되면, 더 이상 나에 대한 그분의 계획을 굳이 캐묻지 않게 됩니다. 그 "사랑"이 하시는 일이니 어련히 알아서 하실까... 하는 믿음이 있으니까요.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시는 "계명", "열매", "명령"은 모두 "사랑"을 가리킵니다. 당신이 곧 사랑이고, 아버지가 사랑이시니 우리도 당연히 되어야 할 "모습"이지요.

제1독서에서는 안티오키아 공동체에 전달된 예루살렘 공의회의 결과를 보여줍니다. 이 대목에는 "우리"라는 말이 여러 차례 등장합니다. 먼저 예루살렘의 사도들과 원로들은 그리스도인이 된 이방인들에게 옛 유다의 관습을 강요해 혼선을 주었던 이들을 "우리"라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우리 가운데 몇 사람이 ... 여러분에게 가서 놀라게 하고 어지럽게 하였다는 말을 들었습니다."(사도 15,24) 실수를 하긴 했지만 그들도 "우리"의 범주 안에 있다는 걸 부정하지 않는 모습입니다. 그들은 체면을 유지하고 비판을 피하려 무조건 부정하고 보는 비겁함을 선택하지 않고, 다만 그런 의견이 "우리" 전체의 뜻이 아니었음을 밝히는 것으로 정리합니다.

"성령과 우리는 다음의 몇 가지 필수 사항 외에는 여러분에게 짐을 지우지 않기로 결정하였습니다."(사도 15,28)

예수님에게서 "친구"의 지위를 얻은 사도와 원로들은 이 결정이 "성령과 우리"의 뜻임을 밝힙니다. 실제로는 결코 동일선상에 놓일 수 없는 두 존재, 하느님의 영과 피조물인 인간이 함께 결론을 내린 것이지요. 이는 하느님 편의 무한한 겸손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인데, 예수님은 "사랑"으로 이를 가능하게 해주신 것입니다.

이 편지를 받은 안티오키아 공동체는 "편지를 읽고 그 격려 말씀에 기뻐하였다."(사도 15,31)고 합니다. 그들의 기쁨에 함께 머무릅니다. 그들은 몇몇 주장 앞에서 어찌할 바 몰랐던 혼란에 대해 이해받았고, 이제 갓 태어난 신앙의 약함을 존중 받았습니다. 또 자기들 문화와 풍습에 맞추어 신앙을 살아갈 방법을 배려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예루살렘 모교회의 "친구"가 되고 또 "우리"가 되었음을 확인하니 얼마나 기뻣을까요! 하나이신 하느님의 자녀로,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몸으로 인정받은 그 기쁨을 무엇에 비길 수 있겠습니까!

일상을 살면서 눈을 크게 뜨고 마음을 활짝 열어 온 세상에 깃든 하느님의 뜻에 깨어 있다면, 우리는 자분자분 당신의 마음과 뜻을 나눠주시는 주님의 자상한 속삭임을 들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친구고, 그분과 함께 "우리"니까요. 우리끼리는 '척! 하면 척!' 서로의 마음을 읽어줄 수 있습니다. 이 "우리"에 대한 강한 소속감과 신뢰는 아무리 깊고 어둔밤이 다가와도 신뢰와 인내라는 마음의 등불을 꺼뜨리지 않게 해 줄 겁니다.

그래서 오늘, 벗님과 함께 "우리" 이렇게 고백합시다. 친구 예수님,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2019.05.23. 부활 제5주간 목요일 2019년




오늘 제1독서인 사도행전에서는 소위 '예루살렘 공의회'라 불리는 사도와 원로들의 회의를 다룹니다. 유다 전통 안에서 살아오지 않은 이방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게 될 때 그들을 어떻게 이끌어야 할지 논의하기 위해서입니다.

"왜 우리 조상들도, 우리도 다 감당할 수 없었던 멍에를 형제들의 목에 씌워 하느님을 시험하는 것입니까?"(사도 15,10)

베드로의 이 말에는 이스라엘 민족이 고수해 온 율법, 제도에 대해 아주 솔직한 심정이 들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새계약의 수혜자가 되고 나서야 비로소 깨닫게 된 진실을 용기있게 말한 것이지요. "사실 우리가 율법 조항들을 지키는 것처럼 보였을지 몰라도, 솔직히, 제대로 다 지켜내기는 어렵지 않았느냐?"는 속내를 이제는 말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사도들은 "다른 민족들 가운데에서 하느님께 돌아선 이들에게 어려울을 주지 말자."(사도 15,19)는 야고보 사도의 판단을 따를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만난 하느님은 점점 더 어렵고 엄격한 조항으로 당신 백성을 옭아매는 존재가 아니라, 당신 백성을 위해 죽을 수도 있는 사랑과 자비의 신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내 이름으로 불리는 다른 모든 민족들도 주님을 찾게 되리라."(사도 15,17)는 아모스서를 인용하여, 이민족의 세례가 이미 예언자의 입을 통해 선포된 하느님의 뜻이었음을 밝힙니다. 한 걸음 먼저 걸어간 사람들이 자칫 범할 수 있는 오류는 "나도 힘들게 겪었으니 너도..." 식의 적용이지요. 그런데 사도들은 이를 "내가 힘들게 겪었으니 너만은..." 으로 성숙하게 뒤집습니다. 그들은 이제 "그들의 믿음이 그들의 마음을 정화"(사도 15,9)했다는 걸 압니다. 혈통이나 율법 조항의 준수로 깨끗하게 되지 않고,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자라는 것을 믿음으로써 깨끗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이제는 몰랐던 과거의 상태로 되돌아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요한 15,9)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저 당신 사랑에 들어와 그냥 머물러 있으라고 하십니다 율법을 준수하고 일정한 자격을 획득하라고 하지 않으시고, 당신 사랑 안에 사랑하면서 머무르라고 하십니다. 주님 사랑 안에 머물기 위해 지켜야 할 계명이 곧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기쁨을 우리 안에 주시려고, 또 당신 기쁨이 우리 기쁨이 되게 하시려고 이 모든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이 말을 너희에게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5,11) 이렇게 모든 주님의 말씀은 위로나 격려뿐만 아니라 탄식과 질책까지도 "기쁨"을 향합니다. 이 기쁨 또한 평화와 마찬가지로 세상이 주는 기쁨이 아닌, "내 기쁨" 곧 예수님의 기쁨입니다. 성령이십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에 깃든 기쁨을 관상합시다. 사도들은 성령의 영감과 도움으로 율법이라는 장벽을 뛰어넘었고, 동시에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선민사상의 우월감을 내려놓은 것입니다. 그러니 사도들은 물론 미래에 한 가족이 될 모든 다른 민족에게까지 큰 기쁨이 아닐 수 없겠지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본질은 명료합니다 곧 사랑입니다. 사랑은 이웃의 짐을 덜어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혈통과 율법 준수로 하느님의 인정을 받은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하느님께서 그들(우리)에게도 성령을 주시어 인정"(사도 15,8)받았기에 이제는 그 짐에 집착하지 않아도 됩니다. 예수님의 기쁨이 우리의 기쁨이 되고 있으니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할 따름입니다. 오늘 남의 짐을 덜어주는 사랑 때문에 기뻐하는 복된 날 꾸미시길 축원합니다.

2019.05.22. 부활 제5주간 수요일 2019년




이방인 지역을 다니며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바오로와 바르나바에게 두 가지 큰 장벽이 있었는데, 하나는 '유다인들의 시기 질투'이고 다른 하나는 바로 '어중간한 그리스도인들의 어중띤 주장'이었습니다.

"모세의 관습에 따라 할례를 받지 않으면 여러분은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사도 15,1)
"그들에게 할례를 베풀고 또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고 명령해야 합니다."(사도 15,5)

이제 막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이 태동하는 시기다 보니 모세, 할례, 계약 등 이스라엘 민족의 뿌리가 되는 요소들 안에서 '계승해야 할 부분'과 '단절하고 새로워져야 할 부분'에 대해 혼선이 생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는 자연스럽고 건강한 반응일 것입니다. 새로움은 부정과 단절, 선택과 계승, 변형과 발전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민할 수밖에 없는 문제니까요.

이미 답을 아는 우리는 성경과 교리를 통해 저 두 주장에 관한 조치를 대략 예상할 수 있지만, 당시 이 문제에 직면한 이들에게는 적잖은 고민이 되었을 겁니다. 어쩌면 사도행전 저자는 의도적으로 이 주장들을 눈에 띄게 직접 인용해 앞으로 펼쳐질 새 계약의 내용과 대비하고자 한 것 같습니다.

사도들의 움직임을 관상합니다. 아직 교회의 조직과 제도가 꼴을 갖추기 전입니다. 저마다 제각기 중요하다고 여기는 부분을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접목해서 의견을 내는데 함부로 따를 수도, 또 함부로 묵살해 버릴 수도 없습니다. 모두가 어리고 약한 상태이고 성령께서 누구에게 영감을 주시는지, 누구를 통해 열매를 맺으실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 때문에 ...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과 원로들에게 올라가기로 하였다."(사도 15,2)
"사도들과 원로들이 이 문제를 검토하려고 모였다."(사도 15,6)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무지를 "겸손히" 인정하고 하느님의 뜻을 "함께" 찾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향합니다. 예루살렘은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성전이 있는 곳이고, 요한묵시록이 말하는 "천상 예루살렘"은 모든 민족들이 그리로 향해 모여 오는 교회를 상징합니다. 이 교회가 곧 혼인잔치를 위해 단장한 그리스도의 신부이고, 어린양이신 그리스도께서 신랑이시지요.

그래서 독서와 이어지는 화답송에서는 "주님의 집"과 "예루살렘"을 노래하고 있지요. 그런데 주님의 집이 있는 곳, 예루살렘은 이제 지리적 · 공간적 예루살렘을 넘어섭니다. "그곳"은 주님의 거처이고 우리의 본향이며 사랑의 자리입니다. "말씀"과 "성체"와 "이웃"을 통해 현존하시는 주님을 "머리"로 하는 "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지체입니다.

자, 이제 복음으로 갑니다. 사도행전과 연결되어서 그런지 오늘 이 대목의 예수님 말씀은 개인보다 공동체를 향하는 고백으로 들리는군요.

"나는 참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요한 15,1) 교회와 우리 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몸이고 아버지는 이 모두를 창조하고 키우고 보살피는 분이십니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한 말로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요한 15,3) 사실 교회와 우리 공동체에 얼마나 죄와 어둠과 흠과 결함이 많습니까! 악도 버젓이 판을 칠 때가 있지 않습니까! 멀리 갈 것 없이, 남 손가락질 할 것 없이 교회 구성원이고 또 교회인 우리 자신만 봐도 변명의 여지가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오늘 죄인들의 집단인 교회가 우리 공동체가 감사하게도 당신의 "말씀"으로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고 선언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성교회를, 우리 각 영혼을 말씀과 빛으로, 물과 성령으로, 당신 피와 사랑으로 정화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성체를 모시기 전에 이렇게 외칩니다. "주님이 부활하시어 우리를 비추셨네. 당신 피로 우리를 속량하셨네. 알렐루야."(영성체송)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요한 15,4)

교회가, 우리 공동체가, 우리 영혼이 주님께서 거처하시는 곳이 되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쉽다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생각과 기억과 의지와 행동이 주님 인격에, 말씀에, 가르침에, 분위기에, 마음에, 행위에 머무를 때 그분께서 이미 우리 안에 들어와 머무르고 계신 겁니다. 서로가 서로 안에 머무른다는 건 일치의 신비입니다. 나와 네가 서로 물들고 하나로 녹아 떼어낼 수 없는 상태의 행복입니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요한 15,5) 교회, 공동체, 주님을 사랑하는 영혼은 신랑이신 그리스도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교회와 영혼을 움직이는 원동력인 사랑을 제외한 채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 너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청하여라."(요한 15,7) 교회, 공동체, 영혼 안에 말씀이 각인되어 흐르고 있다면, 말씀이 원하시는 바와 이질적인 것은 원할 수 없겠지요. 아예 떠오르지도 바라게 되지도 않을 겁니다. 내면에 간직한 말씀이 원하는 것을 나도 원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청하니 이루어질 수밖에 없고요.

그래서 주님과 그분 말씀을 품은 교회, 공동체, 영혼이 바치는 기도는 소중합니다. 주님 안에 머무르고 주님께서 머무르시니 주님의 생각을 하고 주님의 사랑을 하며 주님의 꿈을 꾸기 때문입니다. 그의 바람이 곧 주님의 바람이니, 창조하고 가꾸고 기르시는 아버지께서 외면하실 리 없겠지요.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예수님과 누리는 이 머무름, 일치, 사랑의 목표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아버지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것입니다. "너희가 많은 열매를 맺고 내 제자가 되면 그것으로 내 아버지께서 영광스럽게 되실 것이다."(요한 16,8) 오늘 부족한 죄인인 교회, 공동체, 우리 영혼이 바치는 모든 것을 통해 하느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길 빕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피로 이루신 용서와 정화를 통해, 모든 피조물이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아버지의 영광은 그리스도의 신부로 아름답게 단장한, 천상 예루살렘인 우리를 더 맑고 밝고 영롱하게 비출 것입니다. 아멘.

2019.05.21. 부활 제5주간 화요일 2019년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요한 14,27)

"평화"를 참 많이 이야기하는 시대입니다. 세례를 받는 가장 흔한 이유가 "마음의 평화를 위해서" 라고 하지요. 실상 인간이 평화를 갈망하고 평화를 많이 이야기하는 만큼, 그만큼 우리는 평화를 잃어버린 시대를 살고 있다는 뜻도 되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남기신 평화, 주시는 평화는 감정 상태만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저 무탈하고 풍족한 데서 오는 편안함, 안정감 정도를 넘어선다는 말입니다. 잘 알다시피 평화는 성령의 열매 중 하나지요. 예수님께서 곧 '평화의 왕'이시고, 그분이 바로 "우리의 평화"(에페 2,14)십니다. 지금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평화"를 남기시고 또 주신다고 하시지만, 실상은 당신 자신을 남기시고 또 주시는 겁니다. 또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평화의 "성령"을 남기시고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평화"에 대한 담론에 이어서 "나는 갔다가 너희에게 돌아온다."(요한 14,28)고 하시며 죽음과 부활 이야기를 던지십니다. 또 "세상의 우두머리"(요한 14,30)를 언급해 제자들 간담을 서늘하게도 하시고요.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건 예수님의 평화가 무탈한 풍요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란 점입니다.

오늘 독서에서는 "갔다"와 "전하다"는 동사가 반복되며 사도들의 행동 반경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들어가고 떠나가고 돌아가고 내려가면서 기회가 닿는 대로 복음, 말씀을 전하지요. 자기를 잊고 분주히 오가며 주님의 양떼를 찾아 교회를 꾸려가는 목자의 모습이 숨가쁘게 그려지는데, 초반에 된통 당했던 것같은 사건은 더 언급되지 않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유다인들에게 설득당한 이방인들에 의해 돌을 맞고 도시 밖에 버려졌지요. 그런데 죽은 줄 알았던 그가 일어나 결국은 이튿날 그곳을 떠납니다. 그의 회생이 기적이었는지 죽을 고비를 겨우 넘긴 요행이었는지 사도행전 저자가 따로 밝히지 않습니다만, 모르긴 해도 바오로 사도는 이런 일을 앞으로 무수히 겪을 겁니다. 실제로 코린토2서에 나열된 그의 고난과 죽음의 고비(2코린 11,23-27 참조)는 횟수와 강도면에서 사도행전과 서간들에 언급되어 우리가 익히 아는 사건 이상이니까요. 그런 그들이 "선교 활동을 위해 하느님 은총에 맡겨졌던"(사도 14,26) 안티오키아로 돌아가 하느님의 권능을 보고합니다. "다른 민족들에게 믿음의 문을 예수님 열어 주신 것"(사도 14,27)을 찬양하면서요.

사도들의 보고와 찬양 행간에 깃든 고통과 죽음의 그림자를 그곳 교회 신자들이 몰랐을까요? 아닐 겁니다. 그들 역시 "새로운 길"에 들어서서 믿음을 지키며 분투하느라 이미 충분히 겪어내고 있었을 현실이었기에 구구절절 언급하지 않아도 이해되고 공감되었을 겁니다. 기존 질서와 새로움 사이에는 마찰과 파열, 도전과 갈등이 불가피하니까요.

다시 복음으로 돌아갑니다. 예수님께서 "그는 나에게 아무 권한이 없다."(요한 14,30)고 힘주어 말씀하십니다. 어둠의 권세가 수난, 고통, 죽음을 통해 당신께 엄습해 와도 당신의 평화를 깰 수 없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악의 얼굴을 하고 시시가각 다가오는 고난의 시간에 대해 "내가 아버지를 사랑해서, 아버지의 명령대로, 바로 내가 하는 것"(요한 14,31)이라고 하십니다. 당신의 고통과 죽음은 세상의 우두머리에 끌려가서 어쩔 수 없이 당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의지로 온전히 받아 안은 당신의 "길"임을, 사랑의 선택이고, 사랑의 순명임을 밝히시는 것입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평화를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그분께서 남기시는 평화, 주시는 평화에는 고통과 죽음의 그림자가 없을 수 없습니다. 무탈과 풍요와 안위의 평화가 아닌, 그 실제적 어둠을 딛고 이야기하는 평화입니다. 모든 것을 견디어낸 평화라고 할까요...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평화를 이야기하고 추구할 때 고통받고 가난하고 억압받고 피흘리는 이들과, 그들이 겪는 처절한 현실들을 건너뛰어서는 결코 안된다고 해야겠지요. 마치 없는 듯 슬쩍 눙치고 넘어가 중립을 이야기해서도 안됩니다. "평화"는 그 모든 것을 부둥켜안고 개인과 공동체 내면에서 피와 땀과 눈물, 연민과 공감과 통회로 충분히 발효시키고 승화시켜야 비로소 제 향기를 내고 제 빛을 내는 그런 실재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겪어낸 평화를 벗님에게 남기십니다. 벗님이 지금 누리는 평화가 세상의 것인지 그리스도의 것인지, 그리고 벗님 안에 그 평화가 어느 만큼 썪고 발효하고 승화되고 있는지 돌아보는 오늘 되시길 빕니다. 주님이 주시는 그 평화가 벗님과 늘 함께 하시길 축원합니다. 그리고 그 평화를 주님께서 벗님에게 주고가신 것처럼 벗님도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평화의 사람이 되시길 빕니다. 아멘.

2019.05.20. 부활 제5주간 월요일 2019년




오늘의 복음 부분은 분량이 길지 않은 편이지만 엄청난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요한 14,23)

구약 시대를 성부의 시대라 하지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민족과 계약을 맺으시어 당신 백성으로 삼으시고, 당신은 그들을 돌보시며, 백성은 당신만을 섬기게 하십니다.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육화로 새로운 계약이 이루어지는 시기를 성자의 시대라 합니다. 그때는 실제로 하느님의 아들께서 세상 한복판에서 사람들 사이에 현존하셨습니다. 성부의 시대와 성자의 시대를 칼로 베듯 단절할 수는 없습니다. 성부와 성자께서 한 분이신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또 구약 역사의 토대 위에서 새로운 계약이 나왔고, 구약의 율법과 예언서의 내용이 성자를 통해 실현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 말씀을 지키는 이들에게 아버지와 함께 가셔서 함께 살 것이라고 하시지요. 성부, 성자는 사랑 역시 독자적일 수 없습니다. 육을 지니고 오신 예수님을 사랑함으로써 아버지의 사랑까지 얻는다니, 게다가 성부, 성자께서 친히 오셔서 우리와 함께 사신다니 피조물인 우리에게는 다시 없을 엄청난 행운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거기서 한 술 더 얹어 주십니다.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요한 14,26) 예수님께서 성령까지 언급하시면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모두를 제자들에게(우리에게) 드러내십니다.

곧이어 다가올 성령의 시대는 교회의 시대라고도 하지요. 예수님께서 당신이 떠나신 후 세상에 남을 제자들을 지켜주시고 아버지의 뜻을 실현할 힘과 용기를 북돋워 주실 성령, 아버지의 뜻과 예수님의 가르침을 일깨워주시고 기억하게 해주실 성령을 소개하십니다.

그러니 "한처음에" 세상이 창조된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인류는 단 한시도 하느님의 현존을 벗어난 적이 없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사람이 인정하건 인정하지 않건 모든 피조물, 전 인류는 성부, 성자, 성령의 이어지는 보살핌 속에 기나긴 세월을 대대손손 이어온 것입니다.

제1독서에서 우리는 리스트라에서 일어났던 해프닝을 듣습니다. 바오로와 바르나바가 한 앉은뱅이를 치유하자 군중이 그들을 신으로 여겨 제물까지 바치려 한 소동이지요.

"신들이 사람 모습을 하고 우리에게 내려오셨다."(사도 14,11) 기적을 체험한 군중이 소리를 높여 외칩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얼마나 듣고 싶어하셨을 신앙고백입니까!!! 물론 "육화, 강생"의 신학적 개념과 "사람 모습"이란 말의 미묘한 차이를 볼 때 똑같은 표현이라 보기는 어렵지만, 치유 기적 한 번으로 신의 현존을 고백하는 이방인들의 열린 마음이 놀라울 따름입니다.

"우리도 여러분과 똑같은 사람입니다."(사도 14,15)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그들을 진정시키면서 그동안 그들이 섬겨온 것들의 헛됨을 일깨워주는 동시에, "지난날에는 하느님께서 다른 모든 민족들이 제 길을 가도록 내버려 두셨다."(사도 14,16)는 것, 그러나 "양식과 마음의 기쁨"(사도 14,17 참조)으로 당신 자신을 드러내셨다는 걸 가르쳐줍니다.

그동안 리스트라 사람들이 얻은 일용할 양식은 창조주 하느님께서 세우신 자연의 질서를 통해 왔다는 것, 그리고 어디에서 오는지도 모르면서 누렸던 마음의 기쁨은 실상 성령의 현존이었다는 것을 설파한 것입니다. 물론 그들은 하느님도 성령도 몰랐지만, 당신 이름도 모르는 이들에게 사랑을 베푸신 하느님을 이야기하는 이 대목은, 후일 아테네 설교(사도 17,16-34 참조)에서 드러나듯, 이방인 선교의 기초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삼위 하느님과 관계를 맺고 살아갑니다. 우리와 꼭 같은 인간으로 오셨기에 더욱 친숙한 예수님을 사랑함으로써 아버지도 얻고 성령도 누리는 겁니다. 죽음으로 인류를 구원하신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 믿고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아들과는 친한데 아버지는 어렵고 성령은 모르겠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요.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무지하고 우매한 우리로서는 어느 한 분도 제대로 알지 못하지만, 부족한 채로 예수님께 드리는 불완전하고 보잘것없고 초라한 우리의 사랑이 우리를 삼위 하느님과 함께 살게 해 준답니다. 렙톤 두 닢어치도 못 되는 가난한 사랑을 보시고 삼위 하느님께서 우리보다 더 기뻐하시며 함께 달려오시니, 이 사랑은 정말 한번 해볼 만하지 않습니까? 존재를 걸 만하고 일생을 걸 만한 배팅이 아닌가요? 이 사랑의 초대에 흔쾌히 응답하여 그 사랑의 큰 은혜를 누리시는 벗님을 축복합니다.

2019.05.19. 부활 제5주일 2019년




예수님의 부활사건이 한달이 훌쩍 지나 벌써 부활 제5주일을 맞이했네요. 오늘 독서와 복음에 반복해서 눈에 들어오는 단어는 "새로움"(new)입니다. 새로운 노래(입당송), 새로운 교회 공동체 구성(제1독서 사도행전), 새 하늘과 새 땅(제2독서 요한묵시록), 새 계명(요한복음)...

하느님께서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모든 피조물을 '새롭게' 하셨고, 우리는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받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사랑의 실천으로 그리스도를 입은 '새' 인간이 되었음을 증거하면서,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성령을 기다리는 것이 성령강림대축일을 향해 가는 부활 제5주일의 의미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되셨고 또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도 영광스럽게 되셨다."(요한 13,31)

인간에게 영광이라면 흔히 출세, 부귀영화, 입신양명 등을 떠올리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라면 말이 달라집니다. 그분께서 이 모든 것을 이미 다 가지고 누리고 계시니,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서 "신"의 영광을 찾을 수 있을까요?

오히려 오늘 예수님은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가리켜 "영광"을 이야기하십니다. 인간적 고정관념으로는 어불성설처럼 느껴지지요. 그런데 이렇게 접근하면 어떨까 싶네요. 생명의 주인, 시간의 주인으로서 영원한 생명, 불사불멸을 누리는 "신"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던, 아니 신이 굳이 접근할 필요가 없었던 "고통과 굴욕과 죽음"이라는 영역에까지 들어가신 예수님은, 빛이신 하느님 존재 뒷편의 그늘, 어둠의 절정에까지 침투하심으로써 신의 영역을 확장하신 것이고, 인간의 마지막 원수요 한계인 죽음을 몸소 겪고 부활을 통해 승리하심으로써 진정한 완전성을 쟁취하신 것이라고!

아드님의 온전한 순명은 인류를 위한 구원계획을 가지고 계셨던 하느님께 또한 영광을 드렸고, 하느님께서 죽으셨던 아드님을 친히 일으켜세우심으로써 죽음의 권세까지 지배하시는 하느님의 권능이 드러나게 된 것이지요.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그동안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아버지와 당신의 사랑의 관계에 대해, 그리고 앞으로 받으실 영광에 대해 이야기하신 것은 그저 자랑삼아 하신 말씀이 아니었음은 명백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과의 관계를 드러내심으로써, 서로 사랑하라는, 그것도 당신이 사랑한 것처럼 목숨까지 바쳐 사랑하라는 이 새로운 계명을 이해시키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새로운 교회 공동체의 태동 과정이 마치 교과서처럼 잘 드러나 있습니다. 사도들은 이제 막 신앙의 길에 들어선 "제자들 마음에 힘을 북돋아주고 계속 믿음에 충실하라고 격려"(사도 14,22)합니다. 그들 모습에서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자연스럽게 우러나고 있지요. 그러면서도 좋고 쉽고 편한 꽃길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사도 14,22)한다는 진실을 감추지 않습니다. 또 "교회마다 제자들을 위하여 원로들을 임명하고 단식하며 기도한 뒤에 그들이 믿게 된 주님께 그들을 의탁"(사도 14,23)합니다. 사랑의 계명에 중심을 둔 교회 공동체에 외적 조직과 제도까지 정비하는 모습이지요.

제2독서인 요한묵시록은 세상의 종말론적 완성의 현실을 보여줍니다. "새 하늘과 새 땅!"(묵시 21,1) 신부인 교회와 신랑이신 그리스도의 사랑 가득한 혼인 잔치를 관상합니다. 감사하게도, 이제는 눈물도 죽음도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전 것은 모두 사라져 더 이상 없다고 합니다. "이제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에 있기"(묵시 21,3)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거처." 듣기만 해도 가슴 설레는 말씀이지요. 과거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나와 광야를 떠돌 때 하느님께서 그들 한가운데서 천막을 옮겨다니며 현존하셨지요. 이후 성전 안 지성소에 머무르시다가, 육화하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실제로 사람들 사이에 함께 숨쉬고 울고 웃으며 사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예수님께서 떠나실 때가 되자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것도 잠시뿐이니"(요한 13,33) 너희가 서로 사랑함으로써 내 현존을 이어달라고 제자들에게 당부하시는 겁니다. 그리고 오늘 사도행전에 언급된 사도들의 활동이 이를 잘 반영하고 있고요.

오늘날, 하느님께서는 말씀과 예수님의 성체 성혈로 이 세상 안에서 당신의 현존을 이어가고 계십니다. 아울러 우리! 부족하기 짝이 없고 죄인인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안에 기꺼이 당신의 처소를 지으시고 누추한 곳에 머무르시면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주님께서 현존하십니다!

이상적이고 완전한 하느님 나라인 "새 하늘 새 땅"이 멀게만 느껴지는 오늘의 현실을 살면서도 "보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든다."(묵시 21,5)는 하느님의 힘찬 말씀에 희망을 가져 봅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고통과 죽음이라는 "이전 것들이" 사라졌음을 이미 체험한 인류에게 다시 오실 예수님과 함께 완성될 천상 예루살렘의 도래는 기대 가능한 실재가 되었으니까요.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그날이 올 때까지 우리의 할 일이란, 이 세상에서 주님 현존의 도구로서의 소명을 묵묵히 이어가는 것입니다. 드러나건 드러나지 않건, 성공을 통해서건 실패를 통해서건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우리 각자가 제2의 그리스도로 존재하는 겁니다. 그 조건, 비결은 우리게 주신 새 계명 "서로 사랑하여라"에 있습니다. 부족하지만 서로 사랑하면서 주님께 "새로운 노래"(입당송)를 부릅시다. 그 기적들을 일으키시는 분은 주님이시니까요. 아멘.

2019.05.18. 부활 제4주간 토요일 2019년




먼저 5.18 민주항쟁 기념일을 맞이하여 민주화 영령들을 위하여 엄숙히 묵념합니다.

사람이 되신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 덕분에 피조물에 불과한 제자들이(우리가) 신과 만나고 사귀고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스승과 제자로 너무 가깝게 지낸 나머지 아드님이신 예수님을 통해 성부 하느님도 함께 만나고 있다는 걸 자주 놓치는 제자들은 성부 하느님을 직접 좀 뵙게 해주십사 예수님께 부탁을 드리지요.

이에 예수님은 이렇게 답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요한 14,7) 예수님께서 누차 말씀하시듯이, 아버지와 아들은 한 분이십니다. 아들을 겪으면서 그 아들이 그대로 따라하는 아버지를 알게 되고, 아들을 들음으로써 그 아들이 그대로 전하는 하느님의 뜻을 압니다. 예수님은 두 가지 근거를 제시하십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요한 14,10.11) 성부와 성자, 서로가 서로의 존재에 깃들어 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품고 있고, 서로를 담고 있습니다. 서로 안에 현존하기에 늘 함께이고 뜻과 생각과 지향과 의지와 마음, 사랑을 공유합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이 성부의 말씀과 행적 그대로이기에 뭐가 더 있으신지 따로 더 여쭤볼 필요조차 없습니다. 예수님 존재와 말씀, 행적이 곧 세상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의 그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내 안에 머무르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요한 14,10) 예수님은 당신의 의지를 모두 비우신 채 당신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뜻에 모든 걸 맡기십니다. 절대 선이시고 사랑 자체이신 분이 이루시는 모든 일을 완전히 신뢰하고 따르십니다. 어쩌면 예수님 당신이 바로 성부의 선과 사랑의 열매시지요. 예수님께는 성과나 결과보다 철저히 아버지께 내어맡기고 의탁한 채, 오로지 아버지와 하나로 일치하여 나아간 과정이 중요하고 소중합니다.

제1독서에서는 바오로와 바르나바의 안티오키아 선교 이야기가 계속됩니다. 이틀 전에는 바오로의 입을 통해 구약의 구세사가 일목요연하게 펼쳐졌고(사도 13,13-25), 어제는 그 하느님의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실현되는 과정을 보여주었다면(사도 13,26-33), 오늘은 하느님 구원의 약속이 이스라엘의 경계를 넘어 땅끝까지 퍼지게 되는 출발점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다른 민족들에게 돌아섭니다."(사도 13,46)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새로운 길"에 들어선 바오로와 바르나바를 모독하고 박해하는 유다인들 앞에서 두 사도는 "이민족을 위해 구원의 빛으로 세워진"(사도 13,47 참조) 자신들의 소명을 당당히 밝힙니다. 이때 놀랍게도 다른 민족 사람들이 기뻐하며 주님의 말씀을 듣고 찬양합니다. 바오로에 의하면 유다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받기에 스스로 합당하지 못하다고 판단"(사도 13,46)해 거부와 배척의 우를 범한 것이고, 오히려 이방인들이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정해진"(사도 13,47) 이들인 것입니다.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으로 가득 차 있었다."(사도 13,52) 동족에게 박해받고 내쫒기면서도 기쁨과 성령에 가득 차 있는 그들의 모습은 매우 중요한 사실을 말해줍니다. 즉, 제자들 역시 예수님처럼 자기 뜻과 생각으로 말하지 않고 그들 안에 계신 주님께서 움직이시도록 자신을 비웠기에 이런 반응이 가능했다는 것입니다. 자기 명예와 영광이 아니라 오로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성령께서 떠올려 주시고 이끄시는 대로 움직였기에 그럴 수 있었던 것이지요.

이미 자아를 비운 이는 자신을 움직이시는 주님께 모든 것을 의탁하기에 성공에 으쓱하거나 실패에 쉽게 무너지지 않습니다. 주님의 제자들이 사람들 반응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특히 실패처럼 보이는 순간에도 여전히 기쁨과 성령에 가득 차 있다는 것은, 그들이 말하고 행한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었다는 증거가 됩니다.

내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께 모든 것을 내어맡기고 그분이 하시도록 허용하는 영혼은 복됩니다. 일을 시작하신 분이 마치시리라는 흔들림 없는 믿음으로 서 있는 그에게서, 모욕도 배척도 실패도 죽음도 그 무엇도 "성령과 기쁨"을 앗아갈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5.18 민주항쟁을 기억하고 추모하며 기도하는 오늘, 어떠한 거짓도, 정치적 계략도, 불의한 왜곡도, 그 어떤 악도 진리를 무너뜨릴 수 없고 진실의 거대한 물줄기를 틀어막을 수 없음을 되새깁니다. 그동안 우리 민족이 겪어온 무수한 비극들이 아직 과거가 되지 못했기에 이를 떠올릴 때마다 우리의 눈물도 아직 마르지 않았음을 체험합니다. 우리의 눈물은, 아직 하느님께서도 인류의 고통 앞에서 울고 계시다는 반증입니다. 우리의 눈과 가슴에서 솟구치는 뜨겁고 아픈 눈물은 바로 하느님의 눈물입니다.

1 2 3 4 5 6 7 8 9 10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