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0.24. 연중 제29주간 목요일 2019년




오늘 미사의 말씀들 안에는 긴장감이 감돌고 있습니다. 평화와 분열, 죄와 의로움, 죽음과 영원한 생명 등 상반되는 가치들 사이의 팽팽한 긴장이 느껴집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루카 12,49).
성경에서는 불이란 표상으로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는 대목이 많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아브라함과 하느님의 계약(창세 15,17)에서, 야훼께서 모세에게 나타나 소명을 주신 불타는 떨기 대목(탈출 3,2)에서, 시나이 계약(탈출 20,18)에서, 엘리야 예언자와 바알 일당의 대결(1열왕 18,38)에서 등등 일일이 다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불은 음식을 익히고 단단한 금속도 부드럽게 변화시킵니다. 데워주고 온기를 유지해 줍니다. 또 닿는 존재를 태워 소멸시키기도 하고 정화시키기도 합니다. 불은 옮겨 붙은 대상과 둘로 가를 수 없는 한 덩이가 됩니다. 곧 타자를 불이 되게 합니다.

"이 불이 이미 타올랐다면 얼마나 좋으랴?"(루카 12,50)
예수님께서 세상에 불을 지르러 오셨습니다. 차지도 뜨겁지도 않은(묵시 3,16) 세상에 당신 몸을 던져 불을 붙이시려는 겁니다. 세상 창조 이후 내내 뜨겁게 다가오셨던 성부 하느님과 열렬히 한 몸이 되지 못한 미지근하고 무심한 세상에 출사표를 던지십니다. 당신 스스로 불이 되기로 하시는 겁니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루카 12,51).
예수님은 평화가 아닌 분열을 주러 오셨습니다. 가족 안에서, 민족 안에서 서로 맞서고 갈라지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마음의 평화를 찾아 종교를 갖는 세태에서는 이해하기 어렵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씀이지요. 하지만 진짜로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분열은 시작되었습니다.

정치적 메시아를 꿈꾸던 이들은 십자가에 달린 사형수를 통해 기존의 관념이 찢겨져 나가는 충격을 받을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가 율법의 완성을 통해 이루어지리라 믿는 이들은 율법의 근본 정신인 사랑이 불처럼 율법을 삼켜 사랑 안에 한 덩어리로 타오르는 광경에 경악할 것입니다.

가족, 민족, 공동체를 결집시키는 끈이 온갖 불의와 탐욕, 배타적 우월주의, 이기심, 허영이라면 그 안의 누군가가 각성하고 회개하여 불이 되어야 합니다. 위장된 평화에 안주하거나 거기서 얻은 부정한 이득으로 배불리기보다 차라리 맞서고 갈라서고 찢겨나가야 합니다. 그 틈새로 새어든 불길이 모두를 소독하고 정화하고 거룩하게 하도록 내맡겨야 합니다.

유다인들, 특히 사제들과 원로들과 바리사이들, 율법 학자들 등 사회적 종교적 기득권층은 예수님께서 당신 친히 사랑의 불이 되어 이 세상에 지르신 불을 꺼버리고 싶어했지요. 유다교의 견고한 성역은 예수님에게서 촉발된 "새로운 길"(사도 9,2)을 경계하고 두려워하며 분노했습니다. 당연합니다. 하느님 백성 이스라엘의 신념 표출이니까요. 새로움은 늘 기존 질서를 진지하고 진정성 있게 지켜온 이들의 저항과 거부를 맞닥뜨리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 불은 이천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건재합니다. 사그라들기는커녕 온 세상 곳곳으로 번져나가 태우고 뜨겁게 하고 정화합니다. 진리가 아닌 것에게 진리가 아니라고 외치는 이 불 앞에서 거짓 평화는 검불처럼 타서 공중으로 흩어질 것입니다. 악으로 결집된 관계도 무너지고, 선을 가장한 욕망도 형체 없이 녹아버릴 것입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루카 12,50)
이천 년 역사를 이어오면서 피흘리고 박해받고 순교한 모든 증거자들 안에서 예수님은 짓눌려 오셨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세상 한가운데서 제도와 고정관념과 물신주의로 탄압받는 가난한 이들, 의인들 안에서 예수님은 여전히 짓눌리고 계십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란 순결한 어린양이신 예수님께서 희생제사의 불길 속으로 스스로 걸어들어가신 그 순간에 시작되어 인류를 악의 손아귀에서 모두 다 빼내어 완전히 정화하시고 완전히 성화시키실 날, 곧 주님의 날을 가리킵니다. 우리 모두 고대하고 희망하는 날이지요. 비록 예수님께서 인류의 구원을 위해 피조물 안에서 짓눌리고 계시더라도, 결코 꺼지지 않는 사랑의 불길로 거짓 평화에는 분열을, 거짓 결속에는 새 질서를 선고하십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죄와 의로움에 대해, 죄의 결과인 죽음과 의로움의 열매인 영원한 생명에 대해 지치지 않고 이야기합니다. 율법의 종으로 철저히 매여 살아온 이들에게는 믿음과 사랑이 의롭게 한다는 가르침이 낯설고 위험천만한 모험으로 보일 수 있으니까요.

"이제는 자기 지체를 의로움에 종으로 바쳐 성화에 이르게 하십시오"(로마 6,19).
사도 바오로는 로마인들에게 성화에 이르는 방법으로 차가운 "율법서"를 제시하지 않고 뜨거운 믿음, 뜨거운 사랑으로 얻는 "의로움"을 제시합니다. 단죄하고 자유를 제한하는 율법의 문자를 넘어서, 그 안에 담긴 하느님 사랑의 뜨거운 불 속으로 다가오라는 초대입니다.

"하느님의 은사는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받는 영원한 생명"(로마 6,23).
이 세상에 불을 지르러 오신 예수님의 그 불에 정통으로 맞은 이들은 이 말씀을 알아듣습니다. 불이신 주님과 하나되어 활활 타올라 흠도 티도 없이 순결해진 영혼은 그 자체로 사랑입니다. 사랑의 불입니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은 그 불길을 통해 누리는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먼 미래의 선물이 되기 전에 이미 지금 여기에서 누리는 선물입니다.

2019.10.23. 연중 제29주간 수요일 2019년




오늘의 말씀들은 은총 아래 사는 이의 자세를 권고합니다.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루카 12,40).
예수님께서 "생각하지도 않은 때"(루카 12,40)에 닥쳐올 주님의 날을 위해 준비하라고 제자들에게 이르십니다. 본문 안에는 조금씩 표현만 다를 뿐,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루카 12,46)이란 말씀처럼, 사람의 아들이 오는 날이 얼마나 긴박하고 급작스럽게 들이닥칠지 반복해 묘사하고 있지요.

"주님 이 비유를 저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아니면 다른 모든 사람에게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루카 12,41)
그런데 베드로의 관심은 그 "때"나 내용에 대한 의문보다 말씀의 대상에 더 쏠려 있습니다. 예수님 곁에 있는 "우리"만을 위한 지침인지, 아니면 누구나 다, 모든 사람이 지켜야 하는지 가르침인지 궁금해 합니다. 우월감의 발로일지 책임의 과중함 때문일지 현재로선 잘 모르겠습니다만, 이 의문의 답이 선명하게 떠오를 때가 있을 것입니다.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루카 12,42).
예수님은 집사를 비유로 드십니다. 집사는 주인과 종들 사이를 연결하지요. 주인의 뜻을 종들에게 전달하고, 종들이 주어진 일을 하도록 통솔하면서 그들의 생활도 돌보는 역할을 합니다.

예수님은 주인이 어느날 갑자기 돌아왔다는 설정 아래, 종들을 잘 돌보면서 주인의 집안을 손색없이 꾸려가는 집사와, 맡겨진 종들을 학대하며 자기 욕구와 탐욕을 채우는 집사의 예를 드십니다. 전자에게 "주인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맡길 것"(루카 12,44)이라 하지요. 그의 충실함과 슬기가 그만큼 주인을 흡족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후자는 "매를 많이 맞을 것"(루카 12,47)이라 하십니다. 그의 게으름과 무절제한 욕망이 주인에게 실망을 주고 말았으니까요.

언뜻 듣기에 집사는 일반 군중과 예수님 사이를 잇는 제자들만을 지칭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마치 중간 관리자를 위한 말씀처럼 듣는다면 말입니다. 하지만 좀 더 깊이 숙고해 보면, 우리 중 누군들 집사의 역할에서 온전히 자유로울 수 있을까 싶습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입니다. 온 세상은 인간과 모든 피조물이 서로 연결되어 살아가는 유기체고요. 한 사람이 생명을 받아 세상에 나와서 살아가는 동안, 어느 누구도 돌봄과 연대의 책임에서 배제될 수 없습니다. 건강한 사람이 육신의 활동으로 맡겨진 가족과 이웃을 돌본다면,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이라도 그 마음에 고통 받는 온 세상 모든 영혼들을 품고 돌볼 수 있으니까요.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에게 맡겨질 주인의 모든 재산은 꼭 물리적인 것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은총 이야기를 계속 전개합니다.

"여러분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총 아래 있습니다"(로마 6,14).
은총 아래 있는 이는 "의로움으로 이끄는 순종의 종"(로마 6,16)입니다. 은총의 날개 아래 품어지는 순간 그는 죄를 떠났습니다. 은총 아래 머무르면서 율법의 그늘로 다시 들어갈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율법에서 해방시켜 은총의 길로 이끄셨기 때문입니다.

집사는 주인에 대해서는 물론 종들에 대해서도 율법의 의무가 아닌, 사랑의 의무를 다하는 존재입니다. 율법에만 묶여 최소한의 임무나 수행한다면 그저 대가를 바라고 노동력을 파는 날품팔이꾼과 다를 바 없겠지요. "충실하고 슬기롭다"는 주인의 칭찬은 그 이상의 투신과 헌신을 치하하는 보상입니다.

우리 집사들에게 삶에서 사랑할 기회는 얼마든지 다가옵니다. 내게 맡겨진 가족과 이웃, 지인들을 포함해, 얼굴도 이름도 모르지만 지구 반대편에서 나의 기도와 소박한 자비에 목을 축이고 숨을 연명하는 하느님의 아들딸들, 한 번도 마주친 기억조차 없는 연옥 영혼들까지 우리 돌봄의 울타리는 무한대로 열려 있습니다.

사랑하라고 부여받은 절호의 기회 앞에서, 그가 누구이며, 꼭 내 도움이 필요한지, 나 아니면 안 되는지, 내 감정이 헤프고 공연한지, 내 잔고는 얼마인지 냉철히 분석하고 따지고 계산하는 사이 우리는 은총의 날개 아래에서 다시 율법의 그늘로 빨려들어가 버리고 말 것입니다.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는 마음이 시키는 길, 연민의 사랑이 부르는 길을 따라갑니다. 죄 짓지 않으려고, 실수하지 않으려고 매달리는 율법이 아니라, 자기 안에서 이끄시는 주님의 소리, 은총의 흐름을 듣고 따라가기 때문이지요.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루카 12,48).
자, 베드로의 질문에 대한 답이 나왔습니다. 이 비유의 대상은 제자들만이냐 모든 사람이냐를 떠나서, 주님께서 많이 주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많이"의 기준이 궁금하지요. 그 답은 오늘 이 말씀을 만난 모든 이들의 마음 안에 들어있습니다. 누가 굳이 콕 집어 일러주지 않아도 자신이 가장 잘 아는 답이 솟구칠 겁니다. 그 답을 따라가십시오. 자유롭게, 사랑의 이끄심을 따라, 은총이 허락하는 대로...

주인에게건 종들에게건 절대 사랑의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 "깨어 준비하고 있다면"(복음 환호송) 가능할 것입니다.

2019.10.22 연중 제29주간 화요일 2019년




오늘 미사의 말씀들은 제게 주인의 행복을 이야기합니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놓고 있어라"(루카 12,35).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주인을 기다리는 자세에 대해 이야기하십니다. 혼인잔치에 갔던 주인이 느닷없이, 예고없이, 갑자기 들이닥치더라도, 당장 아무 무리없이 맞이하여 여독을 풀 수 있게 섬길 수 있는 준비 자세를 갖추고 있으라는 뜻입니다.

"허리의 띠"는 치렁치렁한 복장이 노동에 지장을 주지 않도록 허리에 붙들어 매는 끈입니다. '당신을 위해 무엇이라도 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는 마음을 옷 매무새로 표현한 셈이지요.

"등불"을 켜 놓은 상태는 '당신을 기다리기 위해 등불과 함께 제 영혼도 밝히고 있습니다'라는 무언의 메시지입니다. 깜깜한 밤, 저 멀리서 집을 향해 가고 있을 때 집 어딘가에 불이 켜져 있으면 마음이 설레고 위안이 되지요. 거창한 해후가 아닌 일상의 소소한 만남이어도, 모든 만남은 기다림과 기대감이 교차하는 순간입니다. 켜 놓은 등불은 그 기다림과 기대감을 더 밝고 풍요롭게 만드는 힘이 되겠지요.

"그 주인은 띠를 매고 ...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루카 12,37).
종이 자신을 깨어 기다려 준 것이 주인을 얼마나 기쁘고 행복하게 만들었는지 보십시오! 주인은 이를 종의 당연한 의무라 치부하지 않습니다. 긴 잔치와 여독으로 지쳤을 법도 한데 주인이 돌아오자마자 스스로 허리에 띠를 맵니다. 그리고 종들을 앉힌 뒤 그들의 시중을 듭니다.

오늘의 복음 대목에서는 두 차례나 종의 행복을 외칩니다(루카 12,37.38 참조). 그런데 그 행간에는 주인의 행복이 들어 있지요. 얼마나 행복하면 주인이 자청해 종처럼 되어, 종의 종이 되어 종을 섬기겠습니까! 이 역할의 전복, 신분의 전복은 누가 억지로 시켜서 될 일이 아닙니다. 주인 스스로 기쁘고 행복에 겨워 자기 자리, 자기 신분을 잊고(초월하고) 감사와 사랑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그 유명한 죄와 은총의 역설을 이야기합니다.

"한 사람을 통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로마 5,12).
성경은 원조의 불순종으로 인류의 죄가 시작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 죄로 '생명의 나무로 이르는 길은 불 칼로 차단되고'(창세 3,24 참조) 인간은 죽음을 운명으로 떠안게 되었지요. 하지만 인류의 운명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한 사람의 의로운 행위로 모든 사람이 의롭게 되어 생명을 받습니다"(로마 5,18).
사람이 되어 오신 하느님,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 죄 없는 어린양의 순결한 피는 원조가 초래한 슬픈 결말을 뒤집습니다. 하느님께서 종이 되고 사형수가 되셔서 이루신 봉헌으로 인류는 구원의 보증을 받게 된 것이지요.

그런데 이천 년 전에 이루어진 고귀한 희생 제사의 의미를 우리는 얼마나 누리고 있는지요.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의 일상 안에, 생각과 말과 행위 안에 선과 진리를 가장하고 교묘히 스며들어와 있는 죄와 악과 어둠의 실체에게 우리는 번번이 무너집니다. 그리고는 실망하고 좌절하고 용기를 잃어버리지요.

"죄가 많아진 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로마 5,20).
이 구원의 보증은 지금 여기 우리에게도 유효합니다. 비록 영육의 충돌과 모순이 우리를 끌어내릴지라도 예수님의 단 한 번의 희생 제사는 이 모두를 상쇄하고도 남습니다. 그러니 완성될 하느님 나라, 흠도 티도 주름도 없이 완성될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로 거듭나기까지 절망해서는 안됩니다.

주님께서는 오히려 죄가 많은 곳에 은총을 쏟아주십니다. 그분은 단죄와 심판이 아니라, 억압과 박탈이 아니라 은총으로 모든 것을 새롭게 하는 분이십니다. "당신 구원을 열망"(화답송)한다면 그분은 결코 얼굴을 바꾸지 않으십니다. 그것이 그분의 행복입니다.

복음으로 돌아갑니다. 종이 로봇이 아닌 이상 모든 일을 완벽하게 처리할 수 없겠지요. 평소 주인이 종에 대해 완전히 만족하기란 그리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주인이 잔치에서 돌아온 이 순간, 주인은 종이 자신을 깨어 기다려 준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감동 받고 감격해서 종이 되기를 마다하지 않고, 스스로 내려갑니다. 최고의 사랑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 내용은 이렇게 끝을 맺습니다.
"그 종들은 행복하다"(루카 12,38).
저는 거기에 감히 한 마디 덧붙이고 싶습니다. "주인은 더 행복하다"라고요.

2019.10.21. 연중 제29주간 월요일 2019년




오늘 미사의 말씀들은 재산 이야기입니다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루카 12,15).
어떤 사람이 유산 분배의 중재를 예수님께 요청하자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입니다. 사람의 생명을 지키고 하느님 모상으로서 품위를 적절히 유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들이 있지요. 그런 목적으로 임하는 건강한 노동과, 그 대가로 얻는 재화는 필수 기본 요소이고 축복이지, 재물 자체가 악일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 비유 안 부자의 말에 세심하게 귀를 기울입니다.
"내가 수확한 것을 모아 둘 데가 없으니 어떻게 하나? ... 거기다가 내 모든 곡식과 재물을 모아 두어야겠다 ... 나 자신에게 말해야지 ... '자, 네가 ...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루카 12,16-19)

그 부유한 사람의 생각과 말에는 온통 "나", 즉 자기 자신밖에 없습니다. "탐욕"은 모든 힘을 자기 자신에게만 집중할 때 쌓이는 죄입니다. 내 일, 내 수고, 내 재산, 내 안위, 내 행복... 자기중심적으로 쏠리고 기우는 사이 신앙과 진리와 양심은 균형을 잃어버리고, 인간은 우주 만물과 섭리와 복의 근원이신 하느님을 잊어버리게 되지요.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루카 12,20)
탐욕이 슬픈 이유는 모으고 쌓고 누려온 그의 삶에 하느님이 부재하시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분은 곁에 계셨지만 그가 그분을 외면하고 자기 능력과 자기 힘과 자기 재산을 믿었던 것이지요. "나"에게 그토록 집중해 살았건만 정작 "내" 목숨도, "내" 재산도 "나"의 것이 될 수 없는 허무함...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도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루카 12,21).
누가 하느님 앞의 부유한 사람일까요? 또 무엇이 하느님 앞에서도 재화로 인정받을까요?

오늘 제1독서와 연결지어 본다면 그 답은 "믿음"이 아닐까 합니다.

"아브라함은 ... 오히려 믿음으로 더욱 굳세어져 하느님을 찬양하였습니다"(로마 4,20).
여기서 "오히려"라는 말씀이 한층 더 깊숙이 다가옵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아브라함은 자손이 없을 때도, 겨우 얻은 자식을 바치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도 주님께 대한 신뢰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지요. 그는 희망할 수 없을 것 같을 때 희망했고, 약속을 믿을 수 없을 것 같았을 때 믿었습니다.

단순한 믿음도 하느님 앞에 큰 자산으로 남을 텐데, "오히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견지하는 믿음이라면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그런 사람에게 하느님께서 그 믿음에 맞갖은 응답을 주시지 않을 수 없겠지요. 그 이상으로 차고 넘치게 말입니다.

"바로 그 때문에"(로마 4,22).
사도 바오로는 아브라함이 굳게 지킨 그 믿음, 바로 그 확신 때문에 그가 의롭게 된 것이라고 단언합니다. 그리고 이 믿음의 결과는 "우리를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로마 4,24).

우리가 하느님 앞에 쌓을 수 있는 재화는 썩어 없어질 지상 것들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 모아 오만하게 흔들며 내놓는 재물의 악취는 오히려 주님을 불쾌하게 만들 뿐이니까요. 설령 지금 눈 앞에 캄캄한 절벽과 거친 폭풍과 사나운 맹수를 맞닥뜨렸다 해도, 약속이 완전히 실패로 돌아간 듯 보일지라도 주님의 약속이 꼭 이루어지리라는 굳건하고 단순하며 흔들리지 않는 충직한 믿음이야말로 우리가 주님 발 앞, 천국 계좌에 차곡차곡 쌓을 수 있는 천상 화폐가 아닐까 합니다.

의혹과 고통, 절망의 도가니에서 달구어져 더 고귀하고 순결하게 된 믿음은 자기 안에 갇혀 있지 못하고 이웃을 향해 자선이 되고 선행을 낳으며 자비를 발휘합니다. 이 또한 매우 값진 천상 화폐가 되겠지요.

자신만을 위해 축적하고 비축하는 탐욕은 믿음이 결핍될 때 나오는 증상입니다. 먹이고 살리기도 하시지만, 앗아가고 죽이기도 하시는 분, 만물의 주님을 믿지 못하니 자력으로 대비하고 해결해 보려고 죽을 힘을 다해 영혼과 육신까지 갉아먹는 것이지요. 이 얼마나 공허하고 허무한 헛발질인지요.

"보라 주님의 눈은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당신 자애를바라는 이들에게 머무르신다. 주님은 죽음에서 목숨을 건지시고 굶주릴 때 먹여 살리신다"(영성체송).
주님의 눈길을 바라봅니다. 우리 삶의 주인이신 분이 사랑을 듬뿍 담고 지그시 우리를 바라보고 계십니다. 우리 필요와 허기를 우리보다 먼저 알아채시고 재빠르게 반응하시는 그분이 가난하고 비참한 중에 당신을 믿고 바라고 사랑하는 우리에게 이렇게 속삭이십니다.

"네가 많이 힘들구나. 괜찮다. 내겐 다른 거 아무것도 필요없다. 그저 믿기만 하면 좋겠구나 그냥 믿어만 다오."

2019.10.20.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 2019년




전교 주일 독서와 복음 말씀들은 모든 세례받은 이들의 정체성을 일깨워 줍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뵙고 엎드려 경배하였다"(마태 28,17).
마태오 복음의 마지막 대목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분부하신 산에서 스승과 제자들이 만납니다. 그런데 예수님 공생활 시기에 함께할 때와는 사뭇 다른 태도를 보입니다. 친밀감에 앞서 경외감의 최고 예우를 드리는 걸 보니, 제자들에게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부활을 기점으로 인간 예수님의 신성이 더욱 강하게 각인된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가가 이르셨다"(마태 28,18).
예수님께서 먼저 다가가십니다. 그분은 변하지 않으셨지요. 그분은 엎드린 제자들을 다독여 안심시키고 일으키셨을 겁니다. 아마도 부활하신 당신이 예전에 함께 동고동락하던 "그"임을 다정히 확인시켜 주셨겠지요. "다가감!" 죽음과 생명이라는 신비를 사이에 두고 마주한 스승과 제자 사이의 거리감을 좁혀 줍니다. 또한 이 "다가감"은 파견될 이들이 배워야 할 매우 중요한 태도입니다. 마치 빗장을 여는 단계로 비유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를 모르던 이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그분의 사람이 되는지를 반어적 의문문을 반복해 설명합니다.

"자기가 믿지 않는 분을 어떻게 받들어 부를 수 있겠습니까? 자기가 들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듵을 수 있겠습니까?"(로마 10,14-15)
골자만 정리하자면, 파견된 이가 있어야 기쁜 소식이 선포되고, 그래서 누군가 그 기쁜 소식을 들을 수 있어야 믿게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런 믿음이 있어야 예수 그리스도를 받들어 부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복음화의 과정은 무엇보다 먼저 예수님의 다가감, 파견된 이의 다가감으로 시작됩니다. 이는 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아브라함에게, 모세에게, 마리아에게 하느님께서 하셨듯이 구원을 위한 선제적 초대이고 그분의 주도적 권한을 드러내는 표현입니다.

제1독서는 세월이 흐른 미래 어느 날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사야 예언자의 환시 내용입니다.

"주님의 집이 서 있는 산 ... 모든 민족들이 그리로 밀려들고 수많은 백성들이 모여 오면서"(이사 2,2-3).
참으로 희망적이고 생동감 넘치는 활기 가득한 장면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느님께로, 그분의 성소에로 몰려들 모든 민족들은 "주님의 길, 주님의 가르침, 주님의 말씀"(이사 2,3)을 고대합니다. 한때 다윗 시대와 솔로몬 시대에 잠시 누렸던 영화이기도 하지요.

그런데 여기서 구원의 방향성이 구약 시대와 신약 시대에 차이가 있다는 점이 눈에 들어옵니다.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은 예루살렘을 세상의 중심이라 여깁니다. 그곳은 자기 민족을 선택하신 유일신, 창조주 하느님께서 계시는 곳이기에 성역화와 치장, 보존과 수호에 힘을 쏟고 그 자부심도 대단했지요.

세계 만방에 하느님의 이름이 전해지는 벅찬 날을 꿈꾸되, 그런 지극히 높으신 분을 하느님으로 모신 선택된 민족, 자신들의 우월성도 드러나야 하고, 자기들 율법의 탁월함 역시 고스란히 지켜져야 하지요. 이처럼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모아들이고 끌어들이는 방향성은, 민족과 언어와 인종과 문화의 경계를 뛰어넘고 나아가서 이방 민족을 하느님의 자녀로 아우르는 예수님의 다가가는 방향성과 분명 결이 다릅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오늘의 이사야서 대목 안에서 그러한 민족중심주의가 극복되는 말씀이 눈에 띄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이사 2,4).
전쟁과 학살의 철제 무기가 더 이상 불필요한 세상, 살상 도구가 생명을 키우는 농기구로 거듭나는 평화의 시대가 도래하리라는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얼마나 아름답고 벅찬 광경인지요! 이 평화의 상태는, 일부 이기주의적 자본가와 권력가들의 폭력으로 침해받고 상처 입은 가치지만, 신구약을 막론하고 온 인류, 모든 이들의 바람이고 기원입니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마태 28,18).
이제 예수님은 신성과 인성, 생명과 죽음, 빛과 어둠, 선과 악 모든 것의 주인으로서 당신의 권한을 선포하십니다. 그분의 권능은 닿지 않는 곳이 없을 것이고 그분의 영광은 끝이 없을 것입니다.

"온 세상아 즐거워하며 환호하여라"(화답송).
이 기쁨에 찬 초대는 예수님의 지상 명령입니다.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제자들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만이 아니라 모든 이들, 사람만이 아니라 창조된 모든 피조물들이 함께 즐거워하며 환호하라 하십니다. 차별도 구분도 소외도 배척도 없는 만물의 주인께서 베푸시는 구원을, 우리 하느님의 구원을 다가가 전하고 함께 환호하며 찬미합시다. 예수님께서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함께 있겠다"(마태 28,20)고 하셨으니 두려워말고 나아갑시다.

2019.10.19. 연중 제 28주간 토요일 2019년




오늘 미사의 말씀들은 "증언"을 이야기합니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루카 12,8).
"안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의미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안다고 증언하는 것은 그분을 사랑한다고, 그분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이지요.

이 말씀을 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헤아려 봅니다. 그분은 당신을 안다(사랑한다)는 증언에 목마르십니다. 만물의 주인이신 그분이 한낱 보잘것없는 우리가 당신을 알아 주기를(사랑해 주기를), 그래서 안다고(사랑한다고) 말해 주기를 원하십니다. 그분은 열렬히, 또 애절히 우리 사랑을 구걸하며 기다리시는 하느님이십니다.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성령께서 그때에 알려 주실 것이다"(루카 12,12).
회당이나 관청이나 관아로 끌려가더라도 답변을 미리 걱정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인간적 언어로 미리 극본을 짜놓고 대비하다가 자칫 증언이 아니라 변명 혹은 논쟁이 되어버릴 수도 있으니까요. 진실로 "증언"이 되려면 영의 소리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하느님의 일은 하느님의 원리로 설명해야지 세상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내 마음과 입술을 열어주실 "그때"까지 믿고 기다려야 합니다. 그런데 "그때"는 그분께 달렸습니다. 괜한 조급증이 조잡한 내 것과 성령의 진리를 뒤섞어 버릴 수 있으니 신뢰와 인내를 다해 "그때"까지 견뎌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이지요.

또 성령께서 우둔한 내 입을 통해 말씀하시는 순간 그분께 순종해야 합니다. 성령의 증언을 내 식대로 판단해 왜곡, 과장, 축소, 변형하거나 고집으로 입을 다물어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 순간에는 내 자신이 그저 투명하고 유순한 통로가 되어 성령의 언어가 나를 통해 흘러나오도록 허용해야 합니다. 내 것이 끼어들거나 오염시키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아브라함은 믿음을 이야기합니다.

"약속은 믿음에 따라 이루어지고 은총으로 주어집니다"(로마 4,16).
자손이 없던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자손과 민족 약속을 믿었기에 결국 은총으로 "우리 모두의 조상"(로마 4,16)이 됩니다.

"그는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 말씀에 따라 ... 믿었습니다"(로마 4,18).
통계와 논리의 결과를 통해 희망이 생긴다면 그건 희망이라는 단어를 덧입었을 뿐 진정한 희망이 아닐 겁니다. 그저 기대치, 예상치를 조망하는 정도에 불과하다고 봐야겠지요. 희망은 희망할 수 없는 깜깜한 상황에서 희미하게 새어드는 한 줄기 빛이 일으키는 힘입니다. 그 빛이 곧 믿음이지요.

아브라함 자신이 곧 믿음의 "증언"입니다. 희망이 없는 상황에서 하느님 약속의 말씀을 믿고 지킨 그의 존재와 행위가 통틀어 곧 "증언"입니다. 증언은 세상 눈으로는 미련해 보이기까지 한 믿음, 충직하고 충실한 믿음의 열매입니다.

우리의 말은 물론, 우리의 존재도 아브라함처럼 증언이 될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내면에 불질러주신 사랑의 고백뿐만 아니라, 우리의 행동과 표정과 존재 전체가 무심하고 냉랭한 세상을 향해 "나는 주님을 압니다, 나는 그분을 사랑합니다" 하고 외치는 증언이 됩니다. 생생하고 진실된 증언, 믿음과 희망이 묻어나는 증언이 될 수 있습니다.

성령의 목소리를 담은 증언, 믿음과 희망의 존재로 선포하는 증언은 우리에 대한 예수님의 증언으로 보답을 받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천사들, 하느님 앞에서 예수님이 말과 행동과 온 존재로 "나는 ○○를 압니다! 나는 ○○를 사랑합니다!" 하고 외치실 것입니다. 바로 그분 자신이 우리를 위한 증언이고 보증이십니다.

오늘 "나는 예수님을 압니다! 나는 예수님을 사랑합니다!"고 고백하는 날 되시길 축원합니다.

2019.10.18.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 2019년




오늘 미사 독서의 말씀들에서는 복음 선포자가 가야할 길이 보입니다. 사실 독서와 복음 모두에 매우 본질적인 지침들이 담겨 있어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내용이 없지만, 그중 오늘 제게 다가오신 말씀들 위주로 나누고자 합니다.

"청하여라"(루카 10,2).
가장 먼저 준비할 것은 기도입니다. 그들이 사람의 일이 아닌 하느님의 일로 파견되는 것이니까요. 물론 함께 가는 둘 사이의 팀웍도 좋아야 할 것입니다만, 무엇보다 각자 하느님과 갖는 관계성이 선교의 질은 물론 공동체의 분위기를 좌우할 것입니다.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인사하여라"(루카 10,5).
복음 선포자는 평화의 전파자입니다. 그런데 먼저 그 자신이 평화여야 하지요. 그는 스스로 포기한 잉여분의 돈주머니나 여행 보따리, 신발 따위로 신경이 곤두서거나 불안하거나 강팍해지거나 인색해지지 않습니다. 더우기 길에서 사람들과 긴 인사를 나누며 인맥을 쌓고 뒷배를 만들지도 않습니다. 하느님께만 의탁해 가다보면 필요한 순간에 하느님께서 천사를 보내 주실 것이니 인간적으로 보루를 만들지 않아도 됩니다. 이는 믿음의 문제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루카 10,6).
빌어준 평화가 받아들여지지 않고 튕겨 나올 수 있지만, 평화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 평화는 고스란히 복음 선포자에게 되돌아 온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 역시 그 평화를 받을만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뜻도 되겠네요. 그러니 복음 선포자가 먼저 평화의 존재여야 할 것입니다. 평화를 빌어주기 마땅한 이, 평화를 받아 머무르기 마땅한 이여야 합니다.

"주는 것을 먹고 마셔라. ... 차려 주는 음식을 먹어라"(루카 10,7-8).
복음 선포의 길에서 마주칠 일은 그가 선택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를 통해 복음을 접할 이들은 물론 복음 선포자의 구원을 위해서 마련하신 섭리가 다이나믹하게 휘돌고 있는 현장이기 때문입니다.

받아 먹는 음식이 구미에 맞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하도 맛깔져서 은총이라 여기는 것도 있겠지만 쓰디쓴 도전과 실패처럼 뱉어내고 싶은 것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 파견받아 나선 여정에 우연이란 없습니다. 그분이 차려 주신 상 위의 모든 일이 복음 선포자를 성장시킬 양분이 됩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왔습니다"(루카 10,9).
가까이? 분명 "가까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얼마만큼 "가까이"일까요? 꼭 세상 종말이라는 공적인 하느님 나라의 도래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면 이 "가까이"의 거리는 사람마다 천편일률적으로 같을 수 없을 겁니다. 겉보기에 거룩하고 행복한 삶을 택한 것 같은데 정작 지옥에 사는 듯 고통스러워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고, 기댈 곳 없고 가진 것조차 빈약해도 이미 하느님 나라를 선점해 누리는 이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정작 복음 선포자가 하느님 나라와 어떤 거리를 유지하고 있느냐 또한 관건이 됩니다. 본인 입으로 선포하는 "가까이"를 누리며 충만하다면 정말 더 바랄 게 없겠지요. 그래서 그러기를 바라고 또 그러도록 간절히 기도합니다. "주님은 당신을 부르는 모든 이에게, 진실하게 부르는 모든 이에게 가까이 "(화답송) 계십니다.

제1독서의 서간에서는 사도 바오로의 고독이 뚝뚝 묻어납니다. 이 정도로 속내를 드러내는 걸 보면 바오로 사도는 티모테오를 진정 신뢰했던 것 같네요.

"데마스는 ... 나를 버리고 가고..."(2티모 4,10).
"루카만 나와 함께 있습니다"(2티모 4,11).
"아무도 나를 거들어 주지 않고 모두 나를 저버렸습니다"(2티모 4,16).
지금 사도 바오로의 처지는 버림받아 가난하고 고독하고 외롭습니다. 인간 관계 안에서 벌거벗고 텅 비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이 가난과 비움은 인간적으로 참 비참하고 서글플 수 있습니다만, 하느님을 향해 비상하는 엄청난 도약대가 되어 줍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내 곁에 계시면서 나를 굳세게 해 주셨습니다"(2티모 4,17).
하느님과 친밀한 관계를 쟁취할 수 있다면 버림받음조차, 가난조차, 고독과 외로움조차 은총입니다. 선물입니다. 당신께 더 가까이, 더 깊게 끌어당기시고자 마련하신 환경이고, 또 "차려 주신 음식"이기에 그렇습니다.

10월 전교의 달입니다. 교회는,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 본성상 선교의 주체입니다. 직접 선교든 간접 선교든, 말로든 글로든 행동으로든 우리 모두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라고 부르심을 받았지요. 복음 선포자는 기도하는 이, 평화의 전파자, 만족하는 이, 하느님 나라와 가까운 이, 그리고 하느님께만 의탁하기 위해 가난과 고독을 받아들이는 존재입니다. 어떻게 이 모두를 다 만족시킬 수 있냐며 부담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자신을 잘 살펴보면 하느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갖추어주신 선물이 의외로 꽤 많다는 걸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통하여 복음 선포가 완수되고 모든 민족들이 그것을 듣게 하시려"(2티모 4,17)고 먼저 우리를 은총으로 채워주셨습니다. 그러니 믿고 나아갑시다.

2019.10.17.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2019년




오늘 미사의 말씀들은 비장하고 결연한 주제를 담고 있습니다.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불행 선언이 계속되고, 독서에서는 사도 바오로가 율법을 대체할 "믿음"에 대하여 말하는데, 이 모든 내용들이 "책임"이라는 무겁고 중차대한 말씀으로 모아지기 때문입니다.

"세상 창조 이래 쏟아진 모든 예언자의 피"(루카 11,50).
예수님은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의 잘못을 조목조목 밝히신 뒤,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살해해온 죄악을 언급하십니다. 예언자들이 전하는 바가 집권층과 종교 지도자들의 사고방식이나 이익과 불협화음을 낼 때 그들은 가차없이 그 목소리를 없앴지요.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파견하신 사절이며, 곧 하느님의 목소리입니다. 그러니 예언자들이 흘린 피는 바로 하느님의 피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이 세대가 그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루카 11,51).
책임론. 예나 지금이나 책임을 진다는 건 결코 가볍지 않은 일입니다. 되돌릴 수 없이, 이미 벌어진 일의 결과와 파장까지 수습하고 보상하는 일은 커다란 희생과 대가가 요구되고, 설사 책임진다 해도 모두를 만족시킬만큼 온전한 해결은 어렵기 때문이지요.

지금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백성으로서 선사받은 소중한 율법을 민족주의적이고 편협한 율법주의에 사로잡혀 내내 하느님의 목소리를 외면했던 책임을 그들에게 묻고 계십니다. 그런데 사실 그들이 언젠가 자기들 입으로 "책임"을 이야기할 날이 올 것이긴 합니다. "그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은 우리와 우리 자손들이 질 것이오"(마태 27,25). 예수님께 십자가형을 종용할 때 내뱉은 군중의 외침이지요. 이 얼마나 무모하고 경솔한 호언장담입니까...

사실 아무리 권위자이고 지도자라 하더라도 한낱 인간에 불과한 그들이 무슨 책임을 질 수 있게습니까!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 또 이 세대가 그 책임을 져야 할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지금 말씀은 하고 계시지만 실상 속으로는 그 책임을 온전히 당신 것으로 받아안으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동안 역사 안에서 벌어진 이스라엘의 죄와, 앞으로 그들이 그 역사에 편승해 일말의 죄책감도 없이 율법주의적 정당성을 보장받아 벌일 예언자 살해의 완결판(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책임까지 당신이 떠안으려 작정하고 계십니다. 당신 자신에게 모든 죄의 책임을 지우시는 것이지요. 인류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계획과 예수님의 강생 구속이라는 엄청난 호의가 감사는커녕 백성들에게 받아들여지지조차 않아도 예수님은 묵묵히 당신의 길을 가실 것입니다. 이것이 책임지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이제는 율법과 상관없이 하느님의 의로움이 나타났습니다"(로마 3,21).
율법의 열혈 신봉자인 바리사이 중의 바리사이 사울의 입에서 이런 놀라운 고백이 흘러나옵니다. 사도 바오로는 살아있는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돌에 새겨진 율법 조항의 문자를 대신하리라 자신있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유다인 입장에서는 천인공로할 반역적 발언이지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오는 하느님의 의로움 은 믿는 모든 이를 위한 것입니다"(로마 3,22).
게다가 사도 바오로는 이스라엘의 민족주의적 경계까지 허물어 버리고 있지요. 하느님께서는 국적, 종족, 혈연, 제도, 신분이 아니라 믿는 모든 이에게 의롭다 하신다니, 구원의 가능성은 이제 온 인류에게로 활짝 열어 젖혀진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느님의 영광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속량을 통하여 그분의 은총으로 거저 의롭게 됩니다"(로마 3,23-24).
"거저"라고는 하지만 엄밀히 말해 "거저"는 아니지요. 우리는 "거저" 얻었지만 하느님과 예수님의 희생은 "거저"가 아니었으니까요. 이스라엘 역사 안에 줄곧 흘려진 하느님의 피와, 이 모두를 책임지기 위해 당신 자신을 속죄 제물로 내놓으신 예수님의 피로 얻은 의로움의 가치는 가히 헤아릴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이루어진 속죄는 믿음으로 얻어집니다"(로마 3,25).
주님께서 그저 믿으라고만 하십니다. 당신이 책임 진 것에 대해 공치사도 없고 보상도 요구하지 않으시면서, 그저 내가 너희를 위해 한 것을 믿으라고만 하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큰 죄인이어도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 의로움으로 구원될 것이니 그저 믿으라고요... 과연 모든 책임을 떠안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나를 대신해, 내 죄를 대신 책임져 주는 이가 있다면 그에게 감사하고 사랑하지 않고는 못 배기겠지요. 오늘 기념하는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 순교자도 다른 모든 순교자, 증거자들처럼 그 감사와 사랑 때문에 함께 책임지는 길, 곧 순교의 길을 마다 않고 받아 안은 분이지요.

책임을 진다는 것. 그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만, 사랑으로 그 문을 열고 구원의 길을 거저 터 주신 그분이 저만치 앞서 가십니다. 그 길은 사랑으로 장님이 되고 사랑으로 무지해진 영혼만이 흔연히 따라나설 수 있는 길입니다.

오늘 나는 어떤 책임을 떠안고 살아가고 있는지, 또 어떻게 그 책임을 기꺼이 질 수 있을 것인지 묵묵히 숙고해 보는 날 되시길 축원합니다.

2019.10.16. 연중 제28주간 수요일  2019년




바리사이들에 대한 예수님의 불행 선언은 계속됩니다.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은 아랑곳하지 않기 때문이다"(루카 11,42). 율법에서 요구하는 바를 잘 지키는 바리사이들은 십일조나 예식 등 보여지는 것은 나무랄 데 없이 준수하는 이들이라 누구에도 이렇게 정곡을 찔린 적이 없을 겁니다.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 
이 말씀 안에는 그동안 바리사이들에게 무시당해온 하느님의 속내가 담겨 있습니다. 율법을 받은 선택된 백성으로서 유다인이라면 만물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영광과 흠숭과 사랑과 찬양을 받아 마땅한 분이심을 믿고 받아들입니다. 또 모든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이고 보물이며 서로에게 선물임을 믿고 받아들여야 옳습니다. 이것이 하느님 앞에 선 인간이 마땅히 지녀야 할 "의로움"입니다. 이 의로움은 정의롭고 공정하신 하느님께 대한 경외와 이웃에 대한 연민과 자비, 나눔으로 표현될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은 하느님께서 마땅히 받으셔야 할 우리의 뜨겁고 열렬한 사랑입니다. 이는 형식적인 거리만 유지해서는 어림도 없는 내밀한 관계성을 가리키지요. 어쩌면 바리사이들은 하느님을 자기가 속한 제도를 공고히 해 주는, 그래서 자기의 신분적 기득권을 지켜주는 "보스" 정도로 생각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갈망하고 원해서 친밀히 다가가 관계를 맺으며 마음을 다해 섬기는 사랑, 그분 마음을 헤아려 드리는 섬세한 경청의 사랑 대신 의무와 책임 완수로 정례화된 피상적이고 형식적인 관계 말입니다.  

"윗자리를 좋아하고 ... 인사받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루카 11,43). 
예수님은 계속 바리사이들의 실체를 들추십니다. 하느님보다 사람에게 인정받기를 즐기는 그들은 실상 자신을 하느님 자리에 놓고 싶어한 것이지요. 그러니 무지와 삶의 노고와 생계에 짓눌려 하루하루 단순히 살아가는 이들을 "율법도 모르는 저주받은 자들"(요한 7,49 참조)이라 단정하고 죄인의 멍에를 씌우는데 주저함이 없습니다. 종교적으로 하느님 대신 심판의 권한까지 거머쥔 무소불위의 힘을 지금 예수님께서 정면으로 들추고 계십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자신의 실체에는 살며시 눈을 감고 타인의 약함에는 눈을 부릅뜬 채 심판의 칼날을 휘두르는 이들에게 강한 어조로 이야기합니다.  

"아, 남을 심판하는 사람이여, ... 남을 심판하면서 똑같은 짓을 저지르고 있으니"(로마 2,1).  
남을 심판하는 그 자체가 스스로 심판받고 있음을 드러냅니다. 하느님 자비와 사랑에 감싸인 이들은 남을 심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타인의 부족함과 약함을 추상같이 단죄하고 심판하는 냉혈하고 완고한 마음 자체가 이미 그가 받은 징벌 상태가 아닐까 싶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로마 2,11). 
하느님은 악인도 선인도, 율법 준수자도 죄인이라 낙인 찍힌 이도, 부자도 빈민도, 유다인도 이방인도 차별하지 않으십니다. 모두를 조건없이 품으시지요. 이것이 하느님의 공정과 정의, 의로움입니다. 하느님은 이 의로움 위에 자비와 연민의 사랑을 덮고 심판하시지요.   

그렇다면 우리가 감히 하느님의 고유 권한인 심판을 그분 손에서 빼앗아 함부로 휘둘러서는 안되겠지요. 그분만큼 의로울 수 없고 그분만큼 사랑할 수 없으니, 엄밀히 말해 심판할 자격은 주어지지 않습니다. 심판은, 성경에서 명확하게 강조하는 대로 우리의 몫이 아닙니다.  

"백성아 언제나 그분을 신뢰하여라. 그분 앞에 너희 마음을 쏟아 놓아라. 하느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다"(화답송). 
독서와 복음의 강하고 직설적인 어조와 달리 화답송은 내내 위로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분을 신뢰하는 이는 그 믿음으로 의로워질 것이기에, 그가 주님 앞에 쏟아 내어 펼쳐진 마음에 설령 죄와 악과 실패와 한계가 섞여 있어도 하느님은 그와 대적하는 심판자로서가 아니라 넓은 가슴을 열어 그를 품고 숨겨주는 피신처가 되어 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심판입니다.  하느님의 심판이 사랑의 심판이라는 것을 예수님께서 친히 보여 주셨지요. 

"그분의 호의는 우리를 회개로 이끄시려는 힘"(로마 2,4 참조)입니다. 그러니 심판과 단죄의 눈을 치켜뜨기 전에 우리가 받은 사랑에 먼저 눈을 돌리면 좋겠지요. 자신이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사랑과 자비, 연민과 호의를 기억하는 이는 그것으로 타인을 심판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에는 더 이상 심판이 심판이 아니고 사랑이 될 것입니다.  

"주님, 당신이 죄악을 헤아리신다면, 주님, 감당할 자 누구이리까? 이스라엘의 하느님, 당신은 용서하는 분이시옵니다"(입당송).

2019.10.15.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2019년




오늘 미사의 말씀들 안에서는 대립되는 개념의 단어들이 눈에 띕니다. 특히 복음은 오늘부터 사흘간 바리사이들에 대한 불행 선언이 이어질 것이라 분위기가 자못 심상치 않게 흘러갈 것입니다.

문제는 바리사이 집에 식사 초대를 받으신 예수님께서 손을 씻는 정결 예식을 이행하지 않고 식탁에 앉으신 것에서 시작됩니다. 혹시라도 부정한 사람, 사물과 닿아 부정하게, 불결하게 되었다면 손을 씻는 의례를 통해 정결함을 회복한 뒤 음식을 먹는 것이 율법의 규정이니까요.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루카 11,39).
이처럼 예수님께서 돌려 말씀하시지 않고 그들의 생각에 정면으로 대응하십니다. 겉과 속. 외부로 드러나는 "겉"과 내면에 자리한 "속"은 모든 피조물, 특히 사고하고 욕망할 줄 알도록 만들어진 인간의 양대 기본 구조입니다. 우리 모두는 타인과 세상에 보여지는 부분과, 자신만 아는 감추어진 부분을 모두 지니고 있지요.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들지 않으셨느냐?"(루카 11,40)
바리사이들이 간과하고 또 우리도 때때로 잊는 진실이겠지요. 우리를 지으신 하느님께는 우리의 겉이나 속이나 매한가지로 환히 드러나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시편 저자는 이를 "주님 당신께서는 저를 살펴보시어 아십니다. ... 정녕 당신께서는 제 속을 만드시고 제 어머니 배 속에서 저를 엮으셨습니다. ... 제가 남몰래 만들어질 때 ... 당신께 감추어져 있지 않았습니다"(시편 139,1.13.15)라고 고백하지요.

주님께는 겉과 속이 하나입니다. 그분 앞에 우리의 겉과 속이 구분도 경계도 없이 하나로 펼쳐져 있으니 그분께 감추어진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바리사이들처럼 겉꾸민 위선으로 자신을 포장하는 이들을 바라보는 하느님 아버지의 마음이 어떠실까 머물러 봅니다. 거룩한 척, 정결한 척, 의로운 척, 선한 척, 지혜로운 척 애쓰는 그들과 우리에게 그분께서 이렇게 한 마디 던지시지 않을까요. "됐다! 치아라(치워라)! 용 쓰지 마라!" 안쓰러움과 애틋함이 듬뿍 담긴 일갈이지요. 오늘은 바리사이들에 대한 예수님의 마음, 하느님의 마음이 분노 서린 질책이라기보다 그런 안타까움과 애닲음으로 다가옵니다.

제1독서에서는 하느님의 것과 세상 악의 것이 여러 단어로 표현을 바꾸어 등장합니다. "진리 : 불경 불의", "하느님 찬양과 감사 : 허망하고 우둔하고 어두운 마음", "지혜 : 바보", "불멸 : 썩어 없어질", "진리 : 거짓", "창조주 : 피조물."

"그들은 하느님의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어 버리고 창조주 대신에 피조물을 받들어 섬겼습니다"(로마 1,225).
사도 바오로는 "조물을 통하여 알아보고 깨달을 수 있는 하느님의 본성, 즉 영원한 힘과 신성"(로마 1,20 참조)을 얕은 꾀와 욕망과 탐욕으로 덮어버린 불의한 사람들의 행태를 지적합니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 대신 보이는 피조물을 하느님 삼아 자기들 편한 대로 편집하고 조작해 섬기는 이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안타까워하시는 바리사이들처럼 말입니다.

표출되는 행동이 내면에서 우러나는 선이 아닐 때 우리는 위선이라 부릅니다. 위선은 대개 자기 영광과 명예욕, 자기 만족을 목적으로 하지요. 규정과 의례를 준수하는 외적 행위 역시 거룩하고 선하고 진실되고 아름다운 내면의 발로일 때 하느님께 영광이 됩니다. 행위만 보면 사람은 그 속까지 알아차리지 못해도 하느님은 아시지요.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루카 11,41).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에게 해법을 제시하십니다. 그들 속이 "탐욕과 사악"(루카 11,39)으로 가득하다는 걸 모르지 않으시지만, 탐욕과 사악도 하느님의 선이 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시는 겁니다.

그들처럼 우리 내면도 온갖 욕망과 죄스런 생각과 불안정하게 출렁이는 감정들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누구도 우리 주변을 맴돌다 시시각각 영혼을 찔러보는 어둠의 실체를 칼로 베어내듯 떼어낼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없는 듯 모른 척하고 살 수도 없습니다. 인간 실존을 부정하면 할수록 우리는 자신에게서 멀어질 뿐만 아니라 하느님에게서도 멀어지게 되니까요.

그렇다고 바리사이들처럼 자기 내면에는 눈을 딱 감은 채, 한껏 거룩하고 의로운 척, 타인을 단죄하고 심판하는, 겉만 공들여 가꾸는 신앙이어서도 곤란합니다. 내면과 외면의 분열과 각극이 커질수록 '자아'가 하느님과 제 자리를 착각하게 되고, 결국 자기 영광의 우상을 좇다가 하느님을 잃어버리게 되고 말 것이니까요.

그러니 먼저 인정합시다. 우리 안에는 예수님께서 "탐욕과 사악"이라 부르신 온갖 악의 충동이 끼어듭니다. 불교에서 오욕(식욕, 물욕, 수면욕, 명예욕, 색욕) 칠정(기쁨, 분노, 슬픔, 즐거움, 사랑, 미움, 욕망)이라 했던가요. 우리 내면이 겉으로 그럴싸하게 보이는 것만큼 온전히 깨끗하지도, 아름답고 진실하고 선하고 거룩하지도 않다는 걸 겸손히 받아들입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불순하고 불결한 실체가 하느님의 영광이 되는 길이 있으니, 바로 자선이라고 예수님께서 귀뜸해 주시네요. 자선은 도움이 필요한 이웃에게 손을 내미는 착한 행위지요. 선하게 보이기만 하는 위선이 아니라, 진실로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나눔과 희사가 자기 영광과 명예욕과 자기 만족을 목적으로 하지 않을 때 진정한 자선이 되겠지요. 혹 그런 지향이 부차적으로 스며들 수도 있겠지만, 일차적으로는 누군가의 유익을 위한 직접적 선행이 자선입니다. 내면에 무엇이 들어 있건 그것이 자선으로 표출될 때는 도움을 받는 이에게 하느님의 이름과 사랑을 일깨우기에, 하느님의 일이 됩니다. 그렇게 표현된 자선은 언젠가는 결국 자선을 행한 이의 내면의 동기도 바꿀 수 있습니다. 은총의 역습이라고나 할까요... 

오늘 바리사이들에게 내놓으신 예수님의 처방전은 자선입니다. 겉과 속이 통하는 선행, 자선으로 겉과 속이 다른 위선을 극복하라고 초대하십니다. 그 처방전에는 승화의 은총이 숨어 있습니다. 속에 든 것으로 자선을 베풀 때 그 불결함, 부정함도 하느님의 일로 승화되어 존재를 정화하는 은총으로 되돌아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그러니 "괜한 데 용 쓰지 마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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