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7.16. 연중 제15주간 화요일 2019년




오늘 독서와 복음에는 하느님이 숨어 계십니다. 문자상으로는 한 번도 언급되지 않으시지만 등장인물들을 통해 현존하셔서 우리가 그들을 통해 하느님 마음을 감지할 수 있게 이끄십니다. 함께 이 '숨어 계신 하느님'을 한번 찾아볼까요?

제1독서인 탈출기는 모세의 탄생을 다룹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 역사에서 중요한 몫을 담당했던 하느님의 사람이지요. 하지만 원래 그의 탄생은 죽음을 배태하고 있었습니다. "히브리인들에게서 태어나는 아들은 모두 강에 던져 버리"(탈출 1,22)라는 파라오의 명령이 그에게 역시 예외가 아니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그는 이스라엘 동족인 가족과 이집트 공주, 양 쪽 모두의 보호로 목숨을 부지하는 행운의 주인공이 됩니다.

"그것을 열어 보니 아기가 울고 있었다. 공주는 그 아기를 불쌍히 여기며 '이 아기는 히브리인들의 아이 가운데 하나로구나' 하였다."(탈출 2,6)
이방인, 그것도 이스라엘에 죽음의 칼날을 겨눈 이집트 왕실의 공주에게서 숨어 계신 하느님을 봅니다. 생명을 위협받는 작고 가난하고 약한 존재를 가엾이 여기는 마음, 불쌍히 여기는 마음 안에는 그가 누구이건 하느님이 현존하십니다.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 냈다"(탈출 2,10)면서 모세라는 이름을 붙여주며 물 속 상자에 담긴 아기를 구해낸 이집트 공주에게서 우리는 훗날 "바닷물을 밀어내시어"(탈출 14,21)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하느님을 봅니다. 죽음의 권세를 상징하는 물에 삼켜지지 않고 살아난 모세는 "바다 한가운데로 마른 땅을 걸어"(탈출 14,29) 살아난 이스라엘 백성을 보여 주는 동시에, 세례 때 물로 죄를 씻기우고 정화되어 새로운 생명을 얻은 우리 그리스도인을 가리킵니다.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 그리고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마태 11,21.23)
당신이 직접 다니시며 고통받는 이들을 돌보아 주시던 지역을 일일이 거론해 꾸짖으시는 예수님의 노기에 찬 목소리가 들립니다. 백성을 향해 보여주신 그분의 사랑이 얼마나 다정하고 따사로운지 아는 우리로서는 이 날선 목소리가 적잖이 당황스럽지 않을 수 없지요.

복음사가는 이 꾸중의 이유를 "당신이 기적을 가장 많이 일으킨 고을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마태 11,20 참조)이라고 밝힙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지도를 보면 이 세 지역은 예수님의 주요 활동 무대였던 갈릴래아 호수 주변에 자리하고 있으니 어쩌면 예수님을 너무 쉽게 만날 수 있었던 고을들이었나 봅니다. 간절히 찾아 헤매거나 애타게 청하지 않았어도 예수님의 현존과 가르침, 기적의 혜택을 너무 쉽게 누리다 보니 그 가치와 의미를 간과했던 걸까요? 이들은 어쩌면 종교적 혜택을 가장 많이 누리고 있는 우리같은 종교인과 비슷해 보입니다. 그들에게 부어진 특별한 사랑이 깊은 회개의 열매로 맺히지 못하자, 예수님은 이에 안타까움을 느끼시며 그들을 일깨우시는 겁니다.

그들을 향한 예수님 마음의 고통에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느님의 아픈 상처가 들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통해 인류를 구원하시려 그들을 당신 백성으로 삼아 사랑을 퍼부으신 하느님은 번번이 우상숭배로 배반과 모욕을 당하셨지요. 예수님의 각별한 사랑에도 불구하고 이를 여전히 답습하고 있는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 안에는 이스라엘도 들어있고, 또 특별히 부르심을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진정 마음으로부터 회개하기를 미루며 미지근하게 무늬만 띄고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도 들어 있다는 걸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우리 각자는 주님께 특별한 사람들입니다. 아쉬울 것 없는 그분이 무슨 대가를 원하시고 죽음과 죄악의 오류라는 급류에서 우리를 건져내신 것이 아니지요. 새 생명을 얻어 살아가는 우리는 매순간 사랑으로, 사랑이신 주님께로 방향을 돌리는 응답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니 내가 가족과 지인 등 이미 잘 조성된 종교적 환경 덕분에 너무 쉽게 주님을 만나고 누려왔다면 그만큼 감사하며 주님과의 결속을 다져나가야 하겠습니다. 또 내가 고통과 죽음의 물살에서 겨우 건져내어져 주님을 극적으로 만났다면 그 어둠과 상처의 무게만큼 더 절실하게 주님께 매달려야 하겠습니다. 또 내가 오랜 미혹과 갈망의 미로를 돌고 돌아 겨우 그분을 만났다면 그간 쌓인 절원의 두께만큼 귀하고 소중히 그분을 품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니 우리 중 누구도 오늘 예수님의 꾸짖음을 남의 이야기처럼 흘려들을 수 없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벗님, 오늘 예수님과 한 마음으로 외치시는 하느님의 마음이 사랑의 안타까움으로 요동치며 호소하고 계심을 생각하십시오. 숨어 계신 주님께서는 오늘 천국, 지옥의 결과론적 으름장이 아니라 바로 지금 행복할 수 있는 길을 벗님에게 일깨워주고 계십니다. 벗님을 '죽음의 물'에서 건져주신 주님께 감사드리며, 때론 이렇게도 표현될 수 있는 사랑의 절박한 호소에 귀를 기울이며 그에 맞갖게 응답하는 회개의 날 되시길 축원합니다.

2019.07.15.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 2019년




오늘 복음 말씀은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를 뽑아 파견하시면서 해 주신 당부의 마지막 대목입니다. 그래서인지 말씀 행간에 예수님의 다정한 격려가 배어 있지요. 내용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앞 부분(마태 10,34-39)에서는 예수님께서 당신께 합당한 제자의 모습을 제시하시고, 뒷 부분(마태 10,40-11,1)에서는 당신의 제자에게 부여될 위안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 10,34)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훗날 제자들에게 나타나 평화를 주시는 대목(요한 20,19.21)을 기억하는데, 한 입으로 두 말 할 리 없으신 예수님께서 지금 무슨 이유로 정 반대의 말씀을 하시는 걸까요?

이제 막 사도로서의 사명에 들어선 제자들은 따름을 위한 버림과 떠남에 이제 막 입문한 사람들입니다. 부르심을 받아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 곁에 머물기는 하지만, 예수님께서 부여하신 사명에 뛰어들기에는 여전히 기존의 것들과의 유대와 결속에서 자유롭지 못한 상태였을지도 모릅니다. 여기서 "평화"란 그동안 가족을 포함해 세상과의 관계에서 유지해온 적당히 안정적인 위로 상태일 것이고, "칼"은 그간 맺은 관계들을 뒤흔들고 뒤엎고 잘라내어 하느님과의 관계를 우선하도록 새 질서를 잡는 힘을 가리킬 겁니다.

"...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 10,37)
우리는 부정적 결론 앞에서 마치 위협이나 으름장처럼 느껴 긴장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좀 더 편안한 뉘앙스로 바꾸어 읽어 보니, "나를 다른 누구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이야말로 나에게 합당하다."는 의미와 다를 바 없다는 걸 알게 됩니다. 끔찍이 아끼는 부모나 자녀일지라도 자기를 지으신 주님과의 관계가 먼저임을 인식하고, 모든 만물 첫 자리에 주님을 모실 때 다른 사람이나 사물과의 관계도 차츰 제 자리를 잡아갑니다.

"받아들이는 이/사람."(마태 10,40)
여러 차례 반복되는 이 말씀에는 엄청난 신비가 감추어져 있습니다. 제자들을 받아들이면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결국 예수님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아무리 인간적으로 부족한 죄인이라도 제자들이 곧 하느님의 대리자이며 결국 하느님이라는 말씀입니다. 풀 한 포기, 쌀 한 톨에도 우주가 들어있듯, 보잘것없이 가난한 영혼 안에도 하느님께서 깃들어 계십니다. 받아들임은 상대의 내면 겹겹 안에 깊숙이 숨어계신 하느님의 현존을 불러 일으키는 놀라운 능력이지요.

"그가 제자라서."(마태 10,42)
게다가 제자라는 이유로 호의를 입게 되면 호의를 베푼 이에게까지 상이 돌아간다고 하시니, 낯선 사람들과 선교 현장을 앞두고 긴장한 사도들의 어깨가 조금은 펴지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제1독서는 탈출기 도입부입니다. 이집트와 온 세상을 기근에서 구하고 이집트를 강대부국이 되게 일조한 요셉에 대해 알지 못하는 파라오의 등장으로 위기감이 조성되고 있습니다.

"히브리인들에게서 태어나는 아들은 모두 강에 던져"(탈출 1,22)
파라오는 하느님의 백성을 하느님의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어리석음의 전형입니다. 스스로는 이를 "지혜"(탈출 1,10)라고 착각합니다만, 어떠한 지혜도 대립과 증오, 적대 관계와 죽음을 야기하지 않습니다. 지혜가 곧 진리이며 생명이신 그리스도이시고, 그분은 모든 선의 근원이신 하느님과 같은 분이시기 때문이지요.

"억압을 받을수록 더욱 번성하고 더욱 널리 퍼져"(탈출 1,12) 나가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우방이나 아군으로 끌어안아 함께 번영하는 길을 모색하기보다 적으로 규정해 억압하는 길을 택함으로써 모든 맏아들의 죽음이라는 엄청난 비극의 단초를 제공한 장본인, 파라오는 사실 받아들임을 거부한 대가로 국가적 참사를 야기한 인물이라 기록될 것입니다.

앞으로 예수님의 제자들은 선교 여행에서 다양한 인물 군상과 마주하겠지만, 자기들을 받아들여 줄 이들에게 되갚아 줄 축복을 한 아름 안고 파견되는 것이니, 그 발걸음 또한 자신감 넘치고 당당할 수 있을 겁니다. "너희를 받아들이는 사람 앞에 내가 있을 것이고, 내 아버지도 그와 함께할 것이다."라는 뜻의 예수님 격려는 이제까지 익히 들어온 어려움의 순간마다 제자들의 어깨를 두드려 주는 예수님의 손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진정한 평화는 혈연과 민족을 뛰어넘는 새 질서입니다. 기존의 고리른 과감히 끊고 상대가 누구이건 그를 보내신 예수님, 하느님을 받아들여 하느님을 얻는 진짜 지혜가 요구됩니다. 그러고 보니 하느님께 예언자 대접을 받고 의인 대접을 받는 길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예언자를 예언자로, 의인을 의인으로, 제자를 제자로 받아들이는 것이 그 시작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오늘도 발걸음도 가볍게 주님의 파견을 받아 떠나십시오. 여러분을 받아들이는 이들에게 주님의 축복을 선물로 안겨주시고, 또 여러분이 만나게 될 주님의 제자들을 온전히 사랑의 마음으로 주님을 맞이하듯 받아들임으로써 복된 자 되시길 축원합니다. 오늘 축일을 맞는 성 보나벤투라의 이름처럼, "좋은 일이 있을지어다!"(bona ventura!)가 오늘 벗님의 축원이 되시길 빕니다. 아멘.


2019.07.14. 연중 제15주일 2019년




오늘 미사의 독서들 전체에 "말씀"의 거대한 움직임이 담겨 있는 듯합니다. 그 에너지는 마치 대양 심저에서 움직이는 해류 같고, 하늘 위 공기와 바람을 품고 흐르는 대기와 같으며, 온 우주를 가득 메운 하느님의 현존 같습니다.

제2독서를 먼저 봅니다. 콜로새서의 '그리스도 찬가' 부분으로, 사도 바오로의 입을 빌어 우주적 차원에서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요약하고 찬미하는 내용입니다. "하느님의 모상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맏이"(콜로 1,15)이신 그리스도는 "시작"이시고 "만물의 으뜸"(콜로 1,18)이 되십니다. 태초부터 성부와 함께하신 그분은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콜로 1,20) 화해를 이루십니다. 세상 창조부터 인류의 구원까지 모든 순간에 관여하시며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지요. 그런데 "그리스도, 그분"의 자리에 "말씀"을 넣어 읽어도 어색함이 별로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곧 아버지의 말씀, 육화하신 말씀이시기 때문입니다.

"만물이 그분은 통하여 또 그분을 향하여 창조되었습니다."(콜로 1,16)
모든 것은 말씀으로 생겨났고, 그 말씀은 어느 하나도 땅에 떨어져 사라지지 않고 이루어진다는 것이 하느님의 의지이고 우리의 믿음입니다. 하느님에게서 나온 말씀께서는 당신 사명을 반드시 이루고야 마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1독서는 말씀과 백성의 관계를 이야기합니다.
"사실 그 말씀은 너희에게 아주 가까이 있다."(신명 30,14)
그런데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일부 종교 기득권층과 식자층이 말씀을 사유화하면서 말씀이 본래 지향과 달리 점점 문자 안에 갇히게 됩니다. 또 단순 소박한 대중에 맞추어 해석하고 적용해 준다는 것이 말씀의 원뜻과 의미보다 형식에 강세가 붙이는 오류를 낳게 되었지요. 결국 "하늘 나라의 문을 잠가 버린 채 자기들도 들어가지 않으면서 들어가려는 이들마저 막은"(마태 23,13 참조) 그들은 예수님께로부터 호된 질책을 받습니다.

문자로 박제가 된 율법과 예언들이 멀게만 느껴진 군중은 말씀을 힘들고 어렵다고 여기게 되고, 누군가 들려 주고 해석해 주어야만 접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지요. 안타깝게도 여기서 말씀과 인류의 거리감과 괴리감이 형성되어 버리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말씀이 "너희의 입과 너희의 마음에"(신명 30,14) 있다는 근본 원리는 변할 수 없기에, 예수님께서 오셔서 일깨워 주신 것이 바로 이 관계성입니다. 우리 가운데 오시어 현존하신 말씀께서 말씀의 완성을 몸소 보여주셨으니까요.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루카 10,26)
당신을 시험하려 질문을 던진 율법 교사에게 예수님께서 반문하십니다. 너는 실제로 말씀에 어떤 색깔을 입히고 어떻게 온도를 올리며 어떤 감촉을 이식했는지 물으시는 것입니다. 실상 살아 계신 말씀 안에는 판에 박힌 단 하나의 답만 있을 수 없기에 그렇습니다. 말씀은 듣는 모든 이의 실존과 만나 새롭고 다채로운 불꽃을 일으키는 신비이니까요.

예수님께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율법의 근본 정신의 진수를, 저 유명한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어 설명해 주십니다. 유다 민족이 이방인 혼혈이라고 열외시켜 무시하는 사마리아인을 등장시켜, 진정 율법의 정신을 지키는 이는 율법의 수호자로 자처하지만 거기에 매여 마음에 온기를 잃어버린 사제나 레위인이 아니라, "가엾은 마음"(루카 10,33)이 이끄는 바를 행동으로 옮기는 이라면 그가 누구건, 아무리 소외되고 배척받는 죄인이거나 보잘것없는 이라도 상관 없다는 걸 일깨워 주십니다.

비유 속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난 이에게 베푼 기름, 포도주, 노새, 여관, 돌봄, 두 데나리온, 등은 그의 내면에 일어난 "가엾이 여기는 마음"이 형체를 입고 드러난 실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가 내놓은 시간, 그의 정성, 차도를 위한 당부와 약속 역시 진정 말씀이 실제로 움직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것이 곧, 말씀이 뼈와 살을 입은 육화일 것입니다. 입으로만 외치는 사랑이 공허한 것은 잠시 소리와 공기의 파장으로 귀를 울릴 수는 있지만 형체와 움직임으로 연결되지 못해 이내 연기처럼 흩어져 버리기에 누구의 마음도 울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율법의 골자는 귀와 머리에서 멈추는 구호가 아닙니다. 그러니 "누가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루카 10,36)는 예수님의 질문은, "누가 말씀을 지켰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루카 10,37)
누군가의 이웃이 되고, 벗이 되어 주는 것은 귀와 머리만으로는 어림없는 일입니다. 가엾이 여기는 마음이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10,37)는 말씀의 프리즘을 통과하면서 실제로 육화되어야 가능한 일이지요. 자비를 베푸는 것는 사랑이며 자비이신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이고, 그분을 대신하면서 결국 그분이 되는 것입니다. 이미 성 아타나시우스 교부는 신화(神化 Deificatio)를 이야기하며 "사람의 하느님됨"의 진리를 엿보게 해주었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인간에게 부여된 하느님 모상성을 꽃피워 하느님을 닮을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 하느님과 하나 되어 자비 자체, 사랑 자체가 될 가능성이 우리 앞에 열려 있습니다. 이야말로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 박동과 같이 호흡하며, 그리스도를 옷 입고, 말씀을 사는 길입니다 여기까지 이르러야 비로소 말씀과의 관계성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과 하나되는 은총을 간절히 청합시다.

"주님, 당신 말씀은 영이며 생명이시옵니다. 당신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나이다."(복음환호송) 아멘.

2019.07.13. 연중 제14주간 토요일 2019년




오늘 미사 독서말씀 중에 유난히 반복되며 눈에 들어오는 말씀이 있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마태 10,26.28)
"두려워하지들 마십시오."(창세50,19.21)

제1독서인 창세기는 형들이 고인이 된 야곱의 유언을 빙자해 요셉에게 용서를 재차 간청하는 대목입니다. 요셉 덕에 이집트에서 풍요로이 지내던 형들이 아버지 야곱의 죽음을 맞자, 자기들이 요셉에게 저질렀던 죄의 댓가를 이제라도 치르게 될까봐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이미 요셉에게 용서를 빌어 화해가 되었음에도(창세 45,5) 여전히 죄의 굴레에서 자유롭지 못한 형들에게 요셉이 반복해 들려주는 용서의 다른 표현이 '두려워하지들 마시라'는 것이지요. 마치 고백성사를 통해 모든 죄를 용서받았음에도 여전히 과거의 잘못에서 온전히 해방되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을 생각케 합니다.

"형님들이 나에게 악을 꾸몄지만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창세 49,20)
사실 요셉의 마음 속에는 형들이 두려워하는 적개심이나 복수 의지가 보이지 않습니다. 요셉이 이미 하느님의 시각으로 삶의 궤적을 재해석하였기에 분노나 피해의식에서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이지요.

반면 형들의 마음에는 여전히 자기들이 저질렀던 죄악의 상처가 남아서 어둠을 피워올립니다. 그 악취는 두려움이 되기도 하고 죄의식이 되기도 하면서 스스로를 옭아매고 있습니다. 얼만큼 두려워 말라는 말을 듣고 또 들어야 진짜로 두려움에서 해방될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우리는 죄악의 상처가 얼마나 끈질기고 집요한지 가늠할 수 있습니다.

복음에서 "두려워하지 마라"는 말씀은 주님의 제자로서 겪게 될 박해와 고난의 길이 그들만의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스승인 당신이 감수하고 있는 몫임을 밝히는 대목에서 격려처럼 등장합니다. 불과 얼마 전 예수님은 치유 기적으로 한 영혼에게 생기를 되찾아 주셨음에도 바리사이들에게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마태 9,34)는 비난을 들은 바 있으시지요. '스승에게 그런 말을 하는 이들이 제자들에게 무슨 말인들 못 하겠느냐'는 뜻의 이 말씀은 예수님의 제자 파견 당부와 수난예고(마태 16,21-23) 사이에 징검돌처럼 존재합니다.

이처럼 "두려워하지 마라"는 말씀이 등장한 문맥은 조금씩 다르지만,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하나로 모아집니다.
"내가 하느님의 자리에라도 있다는 말입니까?"(창세 50,19)
요셉은 심판과 복수의 주체는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이심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마태 10,28)
복음에서 예수님도 두려워할 분은 오직 하느님이시라고 일러주고 계시지요.

그런데 두려움에 떨고 있는 요셉의 형들에게 잊지 않고 희망의 말씀이 전해집니다.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여러분을 찾아오셔서 ... 데리고 올라가실 것입니다."(창세 50,24)
즉 옛 죄의 굴레에 묶여 퇴행할 때가 아니라는 것, 결국 하느님이 그리고 계신 더 큰 구원의 그림 안에서 "반드시" 이루어질 구원의 약속을 믿고 기다리라는 뜻입니다.

제자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마태 10,32)
당신을 알고 고백한다는 이유만으로 세상에서 배척과 박해를 당하겠지만, 바로 그 앎과 고백 덕분에 그 이름이 하느님 귓가에, 그분 마음에 새겨지리라는 희망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여러분은 두려우신가요? 사실 우리는 서로 생김새가 다른 만큼 영혼도 고유하고 삶의 모습도 다릅니다. 저마다 두려움의 종류와 크기, 농도와 색깔 또한 다를 겁니다. 나의 두려움은 어디서 오는 걸까요? 그것이 하느님의 선하심과 자비 앞에 선 경외심인지, 아니면 아직 사로잡혀 있는 욕망과 죄악의 수치스러움인지 직면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희망을 주시는 그분의 초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옛 죄의 언저리를 맴돌고 있다면 희망 쪽으로 고개를 돌려 그만 그 자리를 떨치고 일어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두려움에 싸여 스쳐보내기엔 하느님께서 주시는 희망이 너무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의 축복이 벗님을 온갖 두려움에서 해방시켜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2019.07.12. 연중 제14주간 금요일 2019년




복음에서 열두 사도를 파견하시는 예수님의 당부가 계속됩니다. 그런데 이제 올 것이 왔다는 느낌이 듭니다. 특히 두려움을 야기하는 위협적인 단어가 자주 등장하는데, "이리 떼, 의회에 넘김, 채찍질, 끌려감, 죽게 함, 미움, 박해" 등 입니다. 그저 듣기만 해도 불편하죠. 어쩌면 인생에서 맞닥뜨리고 싶지 않은 복병들입니다.

복음 선포와 치유, 구마 등의 권한을 받아 어깨가 무거우면서도 한편으로 우쭐하기도 했을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제자직의 진면모를 드러내십니다. 이 길은 과거 예언자들이 걸었던 길이고, 주님의 길입니다. 단맛만 존재하는 인생이 없듯, 이제 쓴맛까지 알게 된 제자들이 진정한 제자의 길로 초대된 셈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찬찬이 살펴 읽다 보면 예수님께서 단지 위험 요소만을 나열하시지 않는다는 사실이 눈에 들어옵니다. 끌려가고 채찍질 당하고 관리들 앞에 설 테지만,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니"(마태 10,20) 걱정하지 말라고 격려하시고, 또 당신 이름 때문에 미움을 받겠지만,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마태 10,22)이라고 위로하시지요. 또 박해를 받겠지만 일단 "다른 고을로 피하여라. ...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마태 10,23)라고 약속하십니다.

그러고보니 예수님의 말씀 중에서 그저 고통으로만 끝나는 내용은 없네요. 모든 고난에 희망의 열매가 반드시 따라오고 있다는 것이 보입니다. 이것이 곧 파스카의 여정입니다.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마태 10,16)
예수님께서 얼핏 듣기에 상반되는 덕목을 동시에 요구하십니다. 에덴에서 인류의 적이 되어 버린 뱀과, 노아에게 올리브 잎을 물어다 주어 땅에서 물이 빠졌음을 알린 비둘기의 조합이 좀 어색하게 느껴지지요. 그런데 고대 전통에서 뱀은 지혜의 상징이고, 비둘기는 온유와 순결, 평화와 희망의 상징이니, 이 모든 덕목이야말로 이 험한 세상에서 하느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자질이 싶습니다. 물론 지혜로우면서도 가식으로가 아니라 진실로 순박한 영혼이 되는 건 인위적인 자기 노력만으로 쉽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비우고 또 비워 하느님 안에 깊이 침잠한 영혼이 은총에 힘입어 길어 올릴 수 있는 샘물이니까요.

제1독서에서는 이스라엘이 이집트로 들어가는 모습이 그려지고 있습니다.
"나는 하느님, 네 아버지의 하느님이다. 이집트로 내려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그곳에서 너를 큰 민족으로 만들어 주겠다. 나도 너와 함께 이집트로 내려가겠다. 그리고 내가 그곳에서 너를 다시 데리고 올라오겠다."(창세 46,3-4)

파라오가 혁혁한 공을 세운 요셉에게 호의를 베풀어 그 가족을 이집트로 초청하고(창세 45,16-20), 이를 받아들인 이스라엘의 가족이 이집트에 정착하면서 이제 하느님께 선택된 민족의 역사는 새롭게 전개될 것입니다. 이 모든 과정이 유다 민족의 정신적 구심점이 될 파스카 사건의 밑그림입니다.

죽은 줄 알았던 요셉을 만난 야곱의 기쁨에 머무릅니다. 죽음같은 상실과 실의에 찬 삶 끝에 얻은 놀라운 보상입니다. 이 역시 굵직한 역사적 흐름 사이사이에 존재하는 작은 파스카 중 하나입니다. 고난과 죽음을 통과해 부활로 이어지는 파스카는 민족 전체의 공동 체험이기도 하지만, 제자들 각자, 우리 각자가 저마다의 삶에서 겪어내고 있는 개별적 체험이기도 하니까요.

십자가 죽음 없이 부활은 없습니다. 고난이 없었다면 뒤따라온 행복도 무미건조할 뿐이겠죠. 어둠이 없었다면 빛이 얼마나 아름답고 찬란한지 모를 겁니다. 우리의 삶은 성조들이나 제자들의 삶이 보여주듯, 그저 슬픔과 고통으로 끝나버리지 않고 반드시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위로와 보상의 열매를 맺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 파견 훈화에서 무엇에 시선을 두어야 할지 알 수 있습니다. 고통에만 주목해 주저하고 두려워하느냐, 아니면 이어지는 하느님의 현존 약속을 믿고 의탁하느냐, 파스카의 초대 앞에서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선택하는 일은 우리 몫일 겁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파스카의 신비를 일상 안에서 살아오셨으니 벗님을 축복합니다. 오늘도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우르를 떠나 가나안으로 가고,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떠나 이집트로 내려간 것처럼 벗님도 험한 순례의 여정으로 또다시 초대받을 겁니다. 이집트에서 힘을 기른 이스라엘 민족이 모세의 인도로 다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오게 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십자가로 우리에게 새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이 열렸으니, 벗님에 대한 주님의 축복과 함께하심을 믿고 이 순례의 길을 기쁘게 걸으시길 축원합니다.


2019.07.11. 성 베네딕도 아빠스 기념일 2019년




어제에 이어 오늘 복음은 열두 제자를 파견하실 때 하신 예수님의 당부를 담고 있습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10,8)
이 말씀은 복음 선포, 치유, 되살림, 구마 등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권한"으로 이루어질 모든 일들의 원리가 될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제자들의 소박한 출신 성분이나 기질적 부족함이 오히려 하느님 도구로서의 자질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율법에 능통한 학자 계급도 아니고 의술에 출중한 재주를 지닌 것도 아닌 그저 평범하고 투박한 이들이 하느님의 도구가 될 때, 그 자신이 아닌 하느님의 권능이 더욱 드러나기 마련이니까요. 또 자기 것이 아닌 능력에서 나온 결실에 대해 아무도 소유권이나 독점권을 주장할 수 없을 겁니다. 그 권한의 원천이 자신이 아닌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앞으로 하느님의 기쁜 소식을 듣게 될 이들보다 한 발자국 앞서 은총을 체험한 이들입니다. 순서에 조금 차이가 있을 뿐이지요. 오히려 먼저 받은 이에게는 다른 이를 위해 봉사할 거룩한 사랑의 의무가 주어지는 법입니다.

예수님은 길 떠나는 이가 준수해야 할 가난과 의탁, 머무름, 평화의 기원, 거부당할 때의 대응 방법을 차례로 일러 주십니다.
"마땅한 사람."(마태 10,11)
"평화를 누리기에 마땅하면 ... 마땅하지 않으면..."(마태 10,13)
마땅함이라는 말씀에 머무릅니다. 합당하고 적합하며 제격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지요. 권력이나 재산, 지식, 힘을 소유한 존재를 가리키기보다, 길을 나선 제자들을 환대하고, 가난하고 부족한 그들을 통해서도 하느님 현존을 감지해 존중하는 이들을 가리킬 겁니다.

"누구든지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거든..."(마태 10,14)
제자들은 충분히 거부와 배척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누구에게도 꽃밭만 주어지지는 않으니까요. 예수님은 그에 맞서지 말고 평화의 사람으로서 대응하기를 바라십니다. 담담히 떠나되 어떤 마음의 앙금도 남기지 말고 "발의 먼지"와 함께 털어 버리라고요. 심판은 하느님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제1독서는 요셉과 형제들의 화해를 다룹니다.
"우리 목숨을 살리려고 하느님께서 나를 여러분보다 앞서 보내신 것입니다."(창세 45,5)
놀라고 두려워 당황하는 형들에게 요셉이 한 말입니다. 이는 요셉이 형들에게 버림받아 이국땅에 팔려가면서부터 시작된 고통의 순간마다 하느님께서 자기와 함께해 주시며 복을 내리셨음을 깨닫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말입니다.(창세 39,2.23; 41,38 참조) 내 잘난 덕에, 자기 능력으로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아니고서는 누구도 베풀 수 없는 신비한 힘에 감싸여 왔으며, 비록 이방인이지만 자기를 지키시는 하느님의 힘을 감지하고 경외하며 존중한 여러 "마땅한 사람" 덕분에 살 수 있었다는 걸 놓치지 않는 그는 진정 "하느님의 영을 지닌 사람"(창세 41,38)입니다. 그는 하느님께서 자기 민족의 구원을 위해 자신을 먼저 준비시키셨다고 굳게 믿으며 고통과 슬픔의 앙금을 말끔히 털어내었습니다.

"우리 목숨을 살리려고..."
이집트의 최고 통치자가 된 요셉이 여전히 형제들을 "우리"라 부르고 있다는 사실이 눈길을 끕니다. 비록 자기를 배척하고 사지로 몰아낸 형들이지만 부인할 수 없는 소속과 생명의 원천인 가족, 그리고 그 가족을 돌보시는 하느님은 그가 우여곡절을 견뎌낼 수 있게 지탱해 준 구심점이었을 겁니다.

그렇다고 형들의 잔인한 죄악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큰 믿음과 신뢰가 과정 안에 있었던 아프고 슬픈 상처를 치유해 형들에게 먼저 손을 내밀 수 있게 해준 것입니다. 용서는 충분히 사랑받으며 치유받아 과거를 재해석할 내적 힘이 무르익으면 가식없이 흘러나오게 됩니다.

첫 파견에 나선 예수님의 제자들이 기대와 달리 행여 배척과 거부를 당하더라도, 하느님의 돌보심과 섭리를 믿으면서 묵묵히 가야합니다. 아직 하느님을 맞이할 "때"가 되지 않은 그(그 고을)를 뒤로 하고 길을 떠날 때, 원망하지 않고 온유와 평화를 잃지 않는다면 언젠가 그들과 순수한 용서와 화해를 나눌 날이 찾아올 것입니다. 그때는 "우리"가 진정한 "우리"가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특별나지도 않고 평범하기에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분의 제자가 되어, 이제 그분의 파견을 받은 "평화의 사도"가 되신 벗님을 축복합니다. 거저받은 은혜를 거저 묵묵히 나눔으로써 파견하신 분의 영광을 드러내는 오늘 되시길 축원합니다.

2019.07.10. 연중 제14주간 수요일 2019년




오늘 미사의 말씀은 "열둘"이란 숫자를 내외적으로 품고 있습니다.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복음 선포 사명에 협력할 열두 제자를 뽑으셨고, 독서에서는 이스라엘 민족의 열두 지파를 대표할 열두 아들이 등장하고요. (막내 벤야민은 가나안 땅 아버지 야곱 곁에 남아 있어 이름만 거론됩니다만 요셉과의 끈을 연결하는 중요한 역할이 부여되고 있지요.)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마태 10,1)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신 후 이미 산상설교를 기점으로 꽤 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접해 가르침을 듣고 있던 터라 "이제야 열두 제자를 뽑으셨나?" 하며 이 시점이 새삼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이미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상당한 수의 사람들이 있는데, 그 중에서 보다 깊고 친밀한 관계로 당신과 엮일 정예부대를 "가까이 부르신" 것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가련한 군중의 현실을 목도하신 후,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마태 9,38) 하고 명하신 직후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가장 괴롭히는 더러운 영, 질병, 허약함을 치유할 "권한"(마태 10,1)을 열두 제자에게 첫 선물로 주십니다. 이렇게 "권한"이라고 표현하기는 했지만 사실 무슨 대단한 자격이나 권력이 아니라 그야말로 고통에 시달리는 이들을 돕고 섬기는데 필요한 도구로서의 힘입니다. 이 능력은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고통받는 타인을 위해 쓰기로 되어 있는 선물이지요.

이어서 그 권한을 받은 열두 제자의 이름이 길게 나열됩니다. 이처럼 경전에 이름을 올리는 것은 실제로 그 당시 그 인물들이 존재했다는 역사적 진실성에 보증이 될 뿐만 아니라 해당 인물에게 책임감을 부여하기도 합니다.

여기서 "열둘"이란 숫자는 야곱(이스라엘)이라는 한 아비의 피를 나누어 받은 열두 아들과, 그들을 수장으로 하는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상징하는 완전한 숫자입니다. 예수님이 가까이 부르셔서 묶어 주신 열두 사도는 혈연으로 엮인 구약의 백성을 초월하는 하느님 백성을 상징합니다. 모든 인종, 언어, 혈연, 지연, 종교, 신분을 아우르고 포용하는 완전한 하느님의 백성을 가리키지요.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마태 10,6)
사실 이방인 지역도 사마리아 고을도 가지 말고 그저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라는 이 말씀에서 예수님의 마음을 제대로 읽기 위해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자칫 인종차별주의나 민족우월주의, 선민사상을 주장하는 이들이 이용하기 딱 좋은 말씀으로 곡해될 우려가 없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편파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으니까요.

그런데 오늘 복음 내용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니 그 답이 헤아려집니다. 지금의 열두 사도는, 그들을 폄훼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습니다만, 그 자리로 불리워 권한을 받은지 고작 몇 시간도 채 안된, 말하자면 "초짜, 애송이" 단계일 뿐입니다. 그간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어깨 너머로 본 것은 있을지 몰라도 각자 흩어져 그 엄청난 권한을 흉내도 아니고 실제로 수행하기엔 미숙함이 없지 않을 시기일 겁니다. 그야말로 첫 파견이니까요. 갓 사제서품을 받고 파견된 보좌신부나 갓 종신서원을 한 수도자라고나 할까요!

이방인 지역이나 사마리아 고을들은 아직 준비가 덜 된 상태에서 맞닥뜨리게 될 때, 부족한 믿음에 균열을 일으킬 무수한 요소들이 잠재된 곳이지요. 열두 사도는 먼저 종교와 관습이 익숙한 이스라엘 동포들 안에서 길 잃은 양들을 찾아나서는 첫 걸음을 떼면서, 이제부터 차근차근 하느님의 일을 실전으로 배워나갈 것입니다. 그리고 먼 훗날 예수님 부활 사건과 성령강림을 통해 "때"가 되면, 어느새 굳건해진 영혼과 정신, 믿음을 지니고 이방인 지역과 사마리아 고을은 물론 온 세상으로 파견되어 선하고 호의 가득한 "권한"을 수행하게 될 것입니다.

아직 채 준비가 되지 않은 미숙한 상태에서 "권한"은 자칫 오용될 염려가 큽니다. 또 감당하기 벅찬 상황 안에서 이 권한을 섣부르게 사용하게 되면, 성공하든 실패하든 사도들을 그저 주술사나 치유사 정도로 그치게 해버릴 수도 있습니다. 권한이 기술로 전락하게 되어 버리는 것이죠.

제1독서는 형들의 질투로 팔려가 우여곡절 끝에 이집트 재상이 된 요셉과, 굶주림을 모면하려 곡식을 사러 온 형들의 해후 대목입니다.

"죗값"(창세 42,21).
"피에 대한 책임"(창세 42,22).
형들을 알아본 요셉이 부러 을러대는 으름장에 형들은 영문도 모르고 두려움에 떨다가 이 두 단어를 스스로 꺼내어 듭니다. 느닷없이 당하는 오해와 종용 앞에서 스스로 자기들의 죄를 소환한 것이죠. 이는 어쩌면, 죄악은 당한 이들에게도 지울 수 없는 트라우마를 남기지만, 가해자에게도 영혼에 깊은 상처를 남긴다는 사실을 반증합니다. 남에게 해를 입힌 자는 삶의 구비구비마다 부딪히게 되어 있는 크고 작은 고통 앞에서 끊임없이 죄책감에 시달리며 범죄 현장으로 돌아가 그 언저리를 맴돌게 되어 있습니다. 결국 그 자신도 죄악의 피해자인 셈입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의 첫 파견 때 주신 권한이 바로 이 죄악의 고리를 끊어 주라는 것입니다. (물론 모든 병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당시 사고방식 안에서) 더러운 영과 영육의 질병과 허약함은 부지불식간에 스스로를 묶어두는 죄악의 상처에 그 뿌리를 두고, 죄책감과 자기혐오와 절망에서 영양분을 받아 성장하니까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그 권한을 허락하실 수 있는 근거는 바로 그분께서 인류의 "죗값"을 치르러 오셨고 "피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짊어져 희생제물이 되셨다는 데 있습니다. 인류의 모든 죄에 대해 책임을 지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지요.

"주님은 민족들의 의지를 꺽으시고 백성들의 계획을 흩으신다. 주님의 뜻은 영원히 이어지고 그 마음속 계획은 대대로 이어진다."(화답송)
어떤 구실로도 요셉의 형들이 저지른 죄를 정당화할 수는 없지요. 다만 하느님께서 그런 험한 꼴을 당한 요셉에게 힘이 되어 주시고 민족의 구원을 위한 도구로 성장시켜 주셨다는 사실에서 인간의 얕은 계략과 검은 술수보다 크신 하느님의 계획을 느낍니다.

이처럼 악과 결탁한 세상이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육신의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는 있었어도, 결국 이 죽음을 통해 온 인류의 죗값을 치르고 속량하여 구원을 이끌어 내신 하느님 계획 앞에서는 무력할 뿐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권한을 받은 이의 자격과 상관 없이 권한이 제 구실을 할 수 있는 것은, 권한이 권한을 부여한 이의 피의 값이기 때문입니다. 길 잃은 양들을 찾아가 고쳐 주고 싸매 주고 일으키고 온전함을 되돌려 주는 일은 이 권한을 행사하는 제자들을 통해 일하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보잘것 없지만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세상에 파견된 제자들인 벗님을 통해서 오늘도 일하시는 하느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하느님께 감사!


2019.07.09. 연중 제14주간 화요일 2019년




오늘의 복음 말씀은 두 개의 이야기로 구성됩니다. 앞부분은 예수님의 구마 기적과 이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고, 뒷부분은 예수님의 선교 여행입니다.

마귀 들려 말못하는 이를 치유해 주시자 사람들의 평판이 갈라집니다.
"이런 일은 이스라엘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마태 9,33)고 하는 이들이 있는 반면, 예수님의 행적이 못마땅한 바리사이들은 "저 사람은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쫒아낸다"(마태 9,34)고 비난을 하지요.

선을 있는 그대로 선이라 받아들이는 이들은 행복합니다. 재창조의 신비 앞에 경탄하고 찬미하며 하느님의 경이로움에 감사를 올리게 되니 그렇습니다. 반면 자기에게 이득이 되지 않을 것 같은 선에 대해서 악이라 왜곡하여 규정하는 이들은 행복과 점점 멀어집니다. 두려움을 야기하고 혐오스러우며 매사에 찝찝한 상태로 남는 악에 기대어 선을 평가하기에 이미 그쪽으로 기울어진 탓입니다.

군중의 경탄에 예수님께서 어떻게 반응하셨는지, 또 바리사이들의 곡해에 대해서 어떻게 대응하시는지 복음사가는 침묵합니다. 진리를 행하는 이는 주변의 평판에 흔들리지 않는 법이니까요. 호평도 악평도 그분의 태도를 바꿀 수 없습니다. 그분은 진리와 선으로 아버지의 뜻을 묵묵히 행하실 뿐입니다.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마태 9,36)
예수님은 귀로 들려오는 평가에는 잠잠하셨지만 이처럼 군중을 만나서 직접 보신 현장에서는 마음이 출렁이십니다.
"가엾은 마음!" 권능과 위엄과 영광의 신을 추구하는 이들에게는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연민과 공감의 마음이야말로 하느님의 실존입니다. 홀로 청정하고 충만한 하늘 위 옥좌를 박차고 내려와 바람 잘 날 없다는 가지 많은 나무가 되신 분은, 자녀들을 흔드는 작은 바람에도 가슴을 앓으시며 애태우십니다.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마태 9,38)
예수님은 양들이 불행한 원인이 "목자의 부재"라고 진단하시고, 제자들에게 기도를 명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맡겨주신 양떼를 진실되고 선하게 돌볼 목자가 필요하다고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그분은 이 말씀을 듣는 제자들 마음에 착한 목자이 되고자 하는 결심이 세워지길 바라셨을 것입니다. 평판에 좌우되지 않고 다만 양들을 불쌍히 여기며 그들의 유익을 위해 헌신할 착한 목자말입니다.

양들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계시는 예수님의 유일한 관심사는 시달리며 기가 꺾인 하느님 백성입니다. 그들이 착한 목자의 손길로 생명을 얻고 풍요로워지고 각자의 생명력을 충만히 살기 바라십니다. 예수님께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곧 유일한 관심사입니다.

제1독서는 그 유명한 야곱의 야뽁강 씨름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혼자 남아 있었다."(창세 32,25)
형 에사우를 만나기 전 보복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득한 야곱이 온 가족을 먼저 건네 보내고 뒤에 혼자 남습니다. 세상에는 공동체적으로 함께 할 일도 있고, 홀로 직면해야 하는 일도 있게 마련입니다. 이는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공동체가 함께 하느님 앞에서 예배와 찬양을 드리는 순간이 소중한 만큼, 각자 하느님과 홀로 대면해 씨름을 하는 순간도 이에 못지않게 중요하고 필요하지요.

"저를 축복해 주시지 않으면 놓아 드리지 않겠습니다."(창세 32,27)
야곱의 집념이 느껴집니다. 눈 먼 아버지를 속여 형의 축복을 가로채고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가 혹독한 세월을 지낸 그가 이제 형을 대면해야 하는 순간에 앞서 자기와 가족의 목숨을 보장받으려고 절박하게 매달리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축복이 지금 그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힘이니까요. 결국 엉덩이뼈를 다쳐가며 목숨을 걸고 매달린 끝에 야곱은 축복을 받고(창세 32,30) "이스라엘"이 라는 이름을 얻습니다.

어쩌면 세상과 인류에게 복을 얻어 주기 위해 당신 목숨까지 바치신 우리의 예수님이, 자기와 가족의 복을 위해 목숨을 걸고 매달린 야곱의 치열한 기도를 확장해 완성하신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하느님과 뒤엉켜 밀고 당기는 야뽁 건널목의 씨름이 예수님께서 겟세마니에서 하느님과 홀로 대면해 바치신, 외롭고 뜨겁고 피땀 어린 절규의 시간을 떠올리게 해 줍니다. 그리고 야곱이 다친 엉덩이뼈는 예수님께서 바치신 목숨으로 연결되어 세대가 바뀌어도 퇴색될 수 없는 사랑의 표징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살다 보면 우리 각자 하느님 앞에 서야 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가족이나 친구, 동료가 대신할 수 없고, 대충 묻어갈 수 없는 결정적 때(카이로스)입니다. 목숨을 걸고, 때론 목숨보다 소중해 보이는 각자의 "무엇"을 걸고 끝까지 매달려 복을 얻어내려는 집념이 과연 스스로에게 있는지 자문해 봅니다. '되면 좋고 안 되면 말고'가 아니라 그분 바로 곁자리를 얻어내고야 말겠다는 거룩한 집념과 갈망으로 주님과의 한 판 승부에 나서려면, 믿음과 열정, 사랑의 근육을 키우고 다듬는 준비가 반드시 필요할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 만나는 말씀과 성체는 이 한 판 승부를 위해 영혼의 체력을 단련하는 훌륭한 도구가 될 것입니다. 아멘.

2019.07.08. 연중 제14주간 월요일 2019년




오늘 미사의 말씀들은 "믿음"이라는 방향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절박한 상황에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에서 나온 믿음이라 할지라도 그 순간은 온 존재의 바람이 실린 절규에 가까운 고백이고, 하느님은 결코 이를 값어치 없다고 여기시지 않습니다.

"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마태 9,18)
회당장의 믿음입니다. 자식을 보내고 억장이 무너지는 고통의 순간이지요. 그런데 그는 분명히 딸이 죽었다고 해놓고서는 "그러나"라는 말 뒤에 영 엉뚱한 말을 합니다. 어떻게 해 주시면 살아나리라는 방법까지 제시하면서요. 회당장의 이 말은 예수님께 청을 드렸다기보다 본인이 믿는 바를 고백하고 선포한 것에 가깝습니다.

"물러들 가라. 저 소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마태 9,24)
선선히 그를 따라나서신 예수님께서 장례가 한창인 집에 들어서시며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당신께 믿음을 고백한 회당장의 그 "믿음"을 믿어주신 겁니다. 그의 인간됨이나 직업, 신분이 아니라 그 단순하고 굳건한 믿음만을 보신 것입니다. 하지만 이를 비웃은 이들(마태 9,24 참조)은 이 놀랍고 신비로운 현장에서 순식간에 열외자로 전락해 버리고 맙니다. 함께 믿음을 고백했거나, 적어도 그 믿음을 기대하기만 했어도 뒤이어 일어날 기적의 기쁨을 함께 나눌 수 있었을텐데 참 아쉽습니다.

복음에는 또 다른 축의 믿음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고생해 온 여인의 믿음입니다. "내가 저분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마태 9,21)

피 흘리는 것을 정결하지 못한 상태로 여기는 고대 관습과 율법의 그늘에서 그녀는 무려 열두 해를 가족과 이웃, 집회와 축제에서 소외되어 살아왔을 것입니다. 율법이나 타인뿐 아니라 스스로도 자신을 더럽고 부정한 존재로 인식하게 되기에 충분한 시간이지요. 게다가 잘 알다시피 열둘은 완전함을 상징하는 숫자이므로 그녀에게 고통의 시간은 영원히 정지된 듯한 죽음과도 같았으리라 짐작해 봅니다.

예수님을 향해 손을 내뻗는 그녀를 관상합니다. 현실에서 부정한 상태인 그녀는 누구도 만지면 안되지만, 믿음이 이 모험을 감행하게 부추깁니다.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 마지막 시도일지라도, 또 아직 사랑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상대에 대한 조건 없는 믿음은 결국 사랑으로 옮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믿음은 충직한 사랑의 다른 이름이니까요.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마태 9,22)
열두 해를 그림자처럼 지내온 그녀를 "딸"이라 다정히 부르시는 예수님의 따사로운 눈길을 바라봅니다. 그녀에게 당장 필요한 치유는 그 자체로 그녀에게 구원이 될 것입니다. 다시 새롭게 공동체 삶에 녹아들 자격을 얻은 그녀가 그 구원을 누리기 위해 가장 필요한 건 다름아닌 "용기"가 될 것입니다.

제1독서인 창세기 대목은 에사우의 복을 가로채고 도주 중인 야곱의 꿈 이야기입니다.

"내가 너에게 약속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않겠다."(창세 28,15)
하느님의 통큰 믿음입니다. 누구보다 야곱의 됨됨이를 잘 아시는 분이 형을 속이고 도망 중인 그에게 조건 없이 복을 내리십니다. 후손의 번성을 약속하신 분이 이 약속을 다 이루어 주실 때까지 함께하신다니, 이 말씀은 곧 영원과 이어져 있습니다. 외롭고 두려운 '홀로' 광야길, 미래를 알 수 없는 막막함 속에서 "함께함"의 약속은 생명수나 다름없을 겁니다.

그런데 이 신비로운 꿈과 하느님 현현, 그리고 어마어마한 약속에 대한 야곱의 응답이 너무 초라하게 들립니다. 조건 없는 하느님의 믿음에 대해 야곱은 조건부 마음으로 응하고 있으니까요.

"... 해 주신다면 주님께서는 저의 하느님이 되시고 ... 이 돌은 하느님의 집이 될 것입니다."(창세 28,22)
간단히 말하자면, '보호와 양식과 의복이 보장되고 무사귀환까지 이루어지면 그때에 '비로소' 제가 당신을 제 하느님으로 모실 것이고, 여기가 '진짜로' 하느님의 집이 될 것입니다'라는 뜻으로 들립니다. 야곱의 계산적이고 거래에 가까운 기도, 이게 바로 인간의 기도 수준일 수 있다는 생각에 부끄럽고 슬퍼집니다. 주님께 대한 우리의 믿음이, 우리에 대한 주님의 신뢰를 절반이라도, 아니 억만분의 일이라도 닮을 수 있다면 그분께 얼마나 큰 기쁨이 될까요!

그런데 야곱의 기도를 꼭 부정적으로만 여겨서는 곤란합니다. 이제 막 시작이니까요. 조건부 신앙은 자기에게 조건 없이 쏟아붓는 주님의 사랑을 체험하면서 조건을 내려놓게 되어 있습니다. 온전한 믿음이 될 때까지 주님께서 믿어 주시고 이루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야곱에게 하신 약속을 다 이루기까지 떠나지 않으시겠다고 하셨으니, 우리는 이루어질 때까지 믿으면 됩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믿음은 모험입니다. 보이는 것, 증명된 것은 앎의 영역이지 믿음의 영역이 아닙니다. 그런데 믿음이 있다면 결과가 보이지 않더라도 오히려 그 결과를 선명히 알게 됩니다. 믿는 바가 곧 결과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니 오늘 야곱의 조건부 기도만큼도 못 되는 우리의 얄팍하고 부서지기 쉬운 믿음부터 손 보아 주십사고 청합시다. 우리에 대한 주님의 약속이 되어가는 동안 믿음도 함께 커갈 테니까요. 우리는 그저 될 때까지 믿으면 됩니다. 나머지는 하느님이 알아서 하실 겁니다. 아멘.


2019.07.07. 연중 제14주일 2019년




오늘 복음은 일흔두 제자를 파견하시며 당부하시는 내용입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몸소 가시려는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당신에 앞서"(루카 10,1) 제자들을 파견하시는데, 당신이 가실 곳으로 '미리, 먼저' 가게 하십니다. 바꾸어 말하면, 주님의 제자, 하느님의 종을 맞이한 고장이나 마을 사람들은 곧이어 주님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 주님의 오심은 어김없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첫번째로 당부하시는 것은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루카 10,2)는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이르시는 첫째 당부가 바로 "기도"입니다! 어떤 일이 맡겨졌건 하느님과 누리는 친밀한 소통이 우선입니다. 파견된 이는 함께 일할 일꾼, 곧 주님의 밭에서 수확을 거두어들일 동료 일꾼을 필요로 합니다. 함께함은 독단이나 독선, 자기 중심과 자기 영광에 도취될 위험을 줄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주어진 일이 무엇이건, 파견받은 모든 이는 하느님 나라를 위해 헌신할 선한 이웃을 동료로 주십사 하는 기도를 우선적으로 바쳐야 합니다. 이는 자신을 위해서는 물론, 일꾼으로 부르심 받을 이들의 구원과, 그들의 수고를 통해 구원을 얻게 될 모든 피조물을 위해서입니다.

이제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루카 10,3)고 하십니다. 어느 목자가 자기 사랑하는 양을 이리 떼 가운데 던져주겠습니까! 그만큼 위험 가득한 세상에로 나아가야 함을 비유하신 것이겠지요. 이 말씀 안에 담긴 예수님 심정이란, 제자들이 스승 없이 홀로 결정하고 해결하며 배워나가야 할 까마득한 여정과 각자의 약함을 아시기에 그저 믿음을 잃지 않고 잘 견뎌 주기를 바라시는 짠한 마음일 겁니다.

"평화!"(루카 10,5) 두번째로 당부하시는 말씀은 어느 집이건 들어갈 때마다 평화를 빌어 주라는 것입니다. 혹 평화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너희에게 되돌아 올 것이니 낭비나 헛수고 따윈 걱정하지 말고 기꺼이 평화를 가득 빌어 주라는 뜻입니다. 평화는 마치 질량 보존의 법칙처럼 제 몫을 다할 때까지 결코 사라지지 않는 축복임을 알겠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평화를 강물처럼 끌어들이시는"(이사 66,12) 분이십니다. 우리는 그저 그 받은 평화를 나눌 의무밖에 없습니다.

"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루카 10,17) 이렇게 파견받았던 제자들이 기쁨에 차 돌아와 자랑합니다. 그런데 그 기쁨이 "주님의 이름 때문"인지, "자기들에게 복종하기 때문"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헷갈립니다. 아마도 딱 어느 한 쪽이라기보다 뭉뚱그려 섞여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자기 영광이 교묘히 섞여 구별이 모호할 때 파견의 주체와 사명 역시 모호해질 위험이 다분한 법입니다. 그래서인지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넌지시 덧붙입니다.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루카 10,20) 예수님은 이미 당신께서 주신 권한이 어떤 성과를 낳았는지 잘 아시고, 또 제자들이 느끼는 기쁨의 원인도 간파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혹 도취되어 있을지 모르는 자기 영광에서 하느님의 영광에로 정화가 필요한 부분을 지적하십니다.

그런데 파견된 이의 이름은 어떻게 하늘에 기록될까요? 그들이 전한 평화를 누리고, 그들의 치유로 회복되고, 그들의 선포로 기쁜 소식을 만난 영육으로 가난한 이들의 기쁨과 흡족한 감사와 찬양이 하늘에, 하느님 가슴에 이름을 새겨지는 것을 바라봅니다. 이는 파견된 이로서는 어설픈 자기 영광에 비길 수 없는 최고의 기쁨이요 보상이 아닐까요?

제1독서인 이사야서에서는 혹독한 유배를 겪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느님의 위로와 기쁨이 선포되고 있습니다. 기쁨, 즐거움, 흡족함, 평화 등 수많은 표상들이 회복과 풍요를 약속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진정 기쁘게 반겨야 할 것이 단지 해방의 행운만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이루신 주님일 것입니다.

"주님의 종들에게서 그분의 손길이 드러나리라."(이사 66,14) 이 해방과 귀환은 어느날 느닷없이 찾아온 우연의 결과가 아닙니다. "때"가 무르익을 때까지 기다리시며 당신의 종들을 준비시키신 하느님의 노고와 돌보심이 이루어낸 결실입니다.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서 일꾼들과 더불어 수고한 결과이고 "양 떼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며 애간장이 다 녹을 때까지 노심초사 마음 졸인 열매입니다. 그러니 이제 이스라엘은 예루살렘으로 인해 우쭐하거나 으쓱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손길이 아니시면 이스라엘의 자랑인 예루살렘은 평화를 잃은 도성, 증오와 반목으로 황폐한 도성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자기 영광의 위험성을 단호히 끊어내는 묘약을 소개합니다.
"나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어떠한 것도 자랑하고 싶지 않습니다."(갈라 6,14) 잘 알다시피 신분과 지력, 신앙 체험과 선교 결실 등으로 누구보다 자랑거리가 많았을 사도 바오로에게 자기 영광에 빠지지 않을 수 있는 제어장치가 곧 주님의 십자가입니다.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스캔들이고 수치이며 걸림돌인 주님의 십자가와, 그분을 따르는 이들에게 허락된 각자의 십자가는 영혼을 오직 본질만 향하게 해줍니다. 십자가가 이어주신 "새 창조만이 중요할 따름입니다."(갈라 6,15) 할례도 율법도 혈연이나 언어, 종족도, 심지어 각자의 죄와 약함까지도 넘어서는 십자가는 구원의 사다리이기에, 우리가 자랑할 것은 이것뿐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하느님의 일을 위해 파견된 우리는 뒤이어 오실 주님의 길을 닦는 사람들이고, 영혼들에게 자기 이름이 아닌, 주님의 이름을 전하는 사람들입니다. "수확할 밭의 주인님"을 도와 모든 것을 주님의 영광을 위해 헌신할 때 솟아나는 사심 없는 기쁨과 평화는 우리의 헌신이 주님께 받아들여졌다는 표징이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제자들처럼 함께 하느님 나라를 위해 헌신할 동료들을 보내주십사 기도합시다. 그리고 끊임없이 주님의 평화를 빌어줍시다. 주님께서 우리가 상상치도 못할 결실을 맺게 해주실 겁니다. 아멘. 하지만 그것 때문에 우쭐거리지 말고 오로지 주님께 영광과 찬미를 돌려드리도록 합시다.

벗님, "평화를 빕니다!"


1 2 3 4 5 6 7 8 9 10 다음